알람브라 궁전, 시간의 문을 열고

책갈피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by 정미영

아침 햇살이 새뜻하다. 나는 알람브라 궁전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책을 펼치고 있다. dosde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출간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다. 매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일상은 다시 내게 익숙한 언어로 말을 걸고는 익숙한 길을 걷게 만든다. 그럴 때 여행지에서 구입했던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면 이국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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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풍경과 이야기로 가득하다. 알람브라의 역사와 왕궁 도시, 장인의 손길이 깃든 무데하르 양식의 정교한 문양들과 기하학의 정원 등이 사진과 언어로 피어나 있다. 책갈피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언제 나뭇잎을 넣어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무척이나 반갑다. 바스러질 것처럼 얇고 마른 잎에서 알람브라 궁전에서의 추억을 되짚어본다. 초록으로 일렁거렸던 정원의 나무들이 되살아나, 그때의 시간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지난 해, 나는 알람브라 궁전을 돌아다니며 시간의 경계에 머물렀다. 나는 분명히 현재를 살고 있는데, 건축물 양식과 수많은 조형물을 보면서 과거 나스르 문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했다. 아랍 왕들의 발소리를 떠올리며 걷다가 익숙함과 낯섦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흔들렸다. 눈앞에 펼쳐진 건 단순한 건축이 아니었다. 돌과 도자 타일에 새겨진 아랍어 문구, 아라베스크 문양과 기하학적 곡선을 보면서 나는 거대한 역사책을 읽는 것 같았다. 세월을 직조한 겹겹의 시간 속에 사람의 손길, 기도의 숨결이 묻혀 있었다.


벽에 손을 대어보았다. 그 순간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이 스페인의 이사벨여왕에게 부탁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정복자에게 쫓겨 가면서도 알람브라 궁전만은 무너뜨리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궁궐을 잊지 못했던 보아브딜 왕은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뒤에 알람브라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하게 궁궐을 만들었단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알람브라 궁전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알람브라 궁전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사자의 안뜰’이었다. 회랑과 마찬가지로 궁전의 여러 방을 연결해 주는 네모난 마당에 사자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앙 분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흰 대리석 바닥 위로 흘렀다. 열두 마리의 사자상은 말없이 입을 다문 채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긴 역사를 거쳐 오면서 사람들은 궁금했다. 열두 마리의 사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상징한다든지, 솔로몬 왕의 신전에 있던 철로 만든 황소였다든지, 일 년의 열두 달을 혹은 열두 별자리를 상징한다는 등의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술탄의 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무하마드 5세가 궁전을 건축한 시기에 사자 분수대도 같이 만들어졌기에, 사자들은 술탄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술탄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유적은 남았다. 사람은 유한의 존재이고 예술은 무한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회랑은 음영의 교향곡처럼 빛과 어둠을 나눴다.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공간을 초월해 그곳을 흐르던 시간들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고 오래 전부터 흘렀던 물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연유로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작곡가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책장을 넘기고 있다. 책에는 군데군데 QR 코드가 수록되어 있어, 그곳을 스캔하면 영상이 펼쳐진다. 궁전 내부나 공예품의 영상을 보고 있으니, 아름다움에 다시금 매료되어 경의를 표하게 된다. 기념품 가게에서 책을 샀던 것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잊힐지도 모를 여행의 추억을 되짚게 하는 선물로 이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책은 가슴속에 고이 접어온 여행지에서의 감동과 설렘의 감정을 불러와 주었다.


여행의 기억은 연기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책 속 문장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햇살 아래 반짝이던 벽면의 타일, 중정에 울리던 물소리가 종이 위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 나는 문장을 음미하며 다시 한 번 회랑을 걷고, 분수 앞에 멈추며 정원의 나무 그림자 안에 머물 것이다. 책을 읽을 때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의 추억은 시간의 문을 열고 내 안에서 깨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