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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산들 Dec 08. 2020

블라인드에 내 저격글이 올라왔다.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3~4년 전부터 직장인들의 대나무 숲과 같은 존재인 블라인드라는 어플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블라인드는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로 처음 나왔을 때는 그 장점만 보였다.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객관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내가 이직하고 싶어 하는 회사는 어떤지 알 수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블라인드는 일종의 자경단 역할도 했다. 악명 높은 몇몇 팀장들은 블라인드가 생긴 이후로 블라인드 내의 평판을 신경 쓰기 시작했고 사무실에서 '샤우팅'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본인의 성격을 지적하는 글이 올라온 이후에 수시로 블라인드를 확인하고, 본인 얘기가 올라오면 친한 동료들을 통해 '신고' 버튼을 누르게 한다고 했다. (일정 횟수로 신고를 받으면 글이 삭제되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블라인드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점점 두드러졌다. 긍정적인 개선방안보다는 신세한탄, 어느 부서의 누가 바람피우는 것 같다는 카더라, 무자비한 인신공격 등등. 나는 언제부터인가 블라인드 앱을 확인하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사실 공격당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직급이 올라가면서 언젠가는 블라인드에서 저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장 10년 차에, 그 우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되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TFT팀에서 일할 생각이 없는지 제안이 왔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제안을 수락하고 팀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나고 친한 동기가 갑자기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오빠 최근에 블라인드 봤어? 오빠네 팀 얘기 올라온 것 같아.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새로 생긴 TFT팀은 떨거지들만 모아놓은 팀이라는 것. 왜 회사는 곧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그런 쓸데없는 팀을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우리 팀은 나 포함 3명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 비난이 나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그다음 날 점심시간에 평소와 달리 우리 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두들 알고는 있지만 쉽게 꺼내지 못하는 그 단어 - 블라인드. 5분 정도 적막이 흐르고 팀 후배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블라인드 보셨어요?" 팀 후배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글을 본 이후로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나름 착하게 회사 생활했는데 왜 본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 저격글을 올린 사람의 목적은 이거였구나.'


아마도 글을 올린 사람은 우리 팀이 힘들어하길 바랐을 것이다. 늘 회사에서 주눅 든 상태로 다니고 팀원들이 하나둘씩 팀을 떠나고 팀이 와해되기를 바라면서 그 글을 올렸던 건 아니었을까? 글 올린 사람의 목적을 추측하고 나니 용의자 리스트도 대충 정해졌다. 우리 팀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옆팀의 팀장이 유력했다. 경쟁상대가 나타날 때마다 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 소문내고 깔아뭉개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혜원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왕따를 당하게 되었고 이를 엄마에게 털어놓는 되는 장면이다.


"엄마, 나 왕따인가 봐."
"왕따?"
"응, 애들이 내가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노는 데도 안 끼워 줘."
"내버려 둬. 네가 반응하면 걔네들은 신나서 더 할 걸. 너 괴롭히는 애들이 제일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속상해하는 거. 네가 안 속상해하면 복수 성공."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에서
이미지 출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저격글을 보고 나는 더 당당해지기로 결심했다. 누구보다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하고 그 용의자 팀장과 회의할 때도 오히려 더 당당하게 얘기를 했다. 팀 후배에게도 이런 때일수록 주눅 들지 말고 더 당당해지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다행히 더 이상 우리 팀을 저격하는 글은 올라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팀의 상처도 점점 아물어갔다.


이 일이 있은지도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옆 부서 팀장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고, 우리 팀은 TFT팀에서 정식팀으로 승격되었다. 나는 성격 자체가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고 조직 내에서 적(敵)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고 분명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처럼 블라인드를 통해서 아니면 본인의 최측근들을 통해서 나를 깎아내리려 들지도 모른다.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당신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의도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에서 혹은 학교에서 당신을 싫어하는 누군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의도대로 힘들어하지 말고 당당히 맞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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