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과 우울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와 우울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이를 대체하는 일련의 이상적 가치-국가, 이상, 평화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태도이며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애도의 경우는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를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해야 한다는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을 영원히 간직한다. 현실적으로 상실한 대상을 무의식의 영역에서라도 상실하지 않으려는 존재 지속의 욕구가 대상을 자아에 이입시키는 것이다. 이는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변환되게 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을 별개의 사건이라기보다 일련의 과정으로 보았다.
“비는 ‘적시는’ 물, 모든 존재와 사물을 ‘젖게’ 하는 물이다. 비는 자신의 액체성으로 존재와 사물을 액체화한다. 그 액화는 모든 형태가 지워지는 듯한 존재의 용해를 체험케 한다. (바슐라르, 물과 꿈)” 물은 ‘용해’한다. 모든 형태가 지워지는 듯한 형국에서도 용질의 성질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현실적 수준의 타협을 이행하지 않고 대상을 그대로 간직하려는 욕구, 새로운 국면으로의 이행을 유보하고 이질적인 상태를 그 자체로 보존하려는 우울의 욕구는 문학에서 물의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그예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임을 어찌할거나 (공무도하가)
님은 물의 죽음을 맞는다. 흐르는 물에 용해된다. 이로서 그는 그 물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존재하며 이는 화자의 외부 풍경을 이룬다. 화자가 ‘님이 죽은 현장으로서의 흐르는 물’이라는 외부상황을 응시하는 한, 님의 부재는 화자의 내부에 각인되어 영원히 흐른다. 죽음 이후의 국면으로 이행하지 않으려는 우울의 욕구가 화자의 시선과 공간을 물에 고정하게 한다. ‘님’이 죽음의 장소로 물을 선택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물의 죽음은 불의 죽음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불은 애도의 기후이다. 불의 죽음은 대상의 부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생각게 한다. (지귀설화, 등신불의 경우)불에 의한 죽음은 대상을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시키거나 주체의 행동 혹은 인식 변화를 가져온다. 문제에 의해 속이 타들어가다가 국면의 전환에 다가가지 못하면 같은 문제로 슬픔에 젖곤 하는 우리를 생각한다면, 애도와 우울을 일련의 과정으로 파악한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이를 대체할만한 외부적인 가치들의 상실에서도 물은 기능한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필연적으로 암시하는 그의 전기를 확인 않더라도, 이 시에서 드러나는 갈등은 비교적 명백하다. 다만 그 갈등을 둘러싸고 있는 물의 양상이 특이하다. 화자의 의지에 의해 둘러진 흐르는 물은 일견 화자가 지닌 자아의 존재양상을 확립하면서 외부와의 갈등에 대해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의 해결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갈등해결의 유보이며 갈등을 영원히 인정한다. 화자와 문제를 일으키는 외부 상황인 ‘시비하는 소리’는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화자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일을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림으로써 끊임없이 유보한다.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는 물에 용해되어 변함없이 존재하며 화자와 화자를 둘러 싼 물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갈등의 전초는 해결의 가능성이 흐르는 물과 함께 끊임없이 유보된다. 단절은 결과적으로 나와 세상을 보존한다. 문제해결의 유보는 이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 방법으로 화자의 내면에 무엇인가를 간직하게 한다. 이는 불에 의한 갈등의 해결과는 양상이 다르다. 모든 갈등을 일소에 덮쳐버리는 불에 의한 갈등 해결(카프 소설)은 새로운 국면(그것이 파국일지라도)과 주체의 변화, 갈등 이후를 예감하게 한다. 그러나 물은, 갈등의 본질에 깊숙이 다가가 근본적인 해결을 꾀하는 것보다는 이를 보존하며 바라보는 데 머문다(탁류). 물은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울한 자의 기후이다.
2. 우울의 서사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형도, 가는 비 온다 (1988?))
우울하려는 욕구는 물을 보게 한다. 물은 가는 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슬픔의 외부 풍경을 구성한다. 그리고 새로 바뀐 간판과 사람들의 바지, 거리를 젖게 하는 외부 작용으로 존재한다. 화자는 이를 ‘응시’한다. 화자의 발화는 이곳에서 일어난 ‘인질극’이 촉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절규하면서 인질극을 벌이던 지강헌은 비지스의 ‘홀리데이’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시에 비교적 명경하게 인용된 이 사건을 짚어보면 비가 향하는 곳을 짐작케 한다. 빗방울은 인질극과 비슷한 곳을 향해 내리며 결국은 죽음을 향한다. 시간을 빌리러 거위처럼 뒤뚱뒤뚱 걷는 ‘사람들’과 대비되어 화자는 비, 혹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이를 응시하는 것은 온전히 화자 자신만의 몫이다. 시적 화자는 인질극이 벌어진 거리를 거닐며 ‘사회적’ 죽음의 현장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현장을 대체한 여자와 고집 센 거위, 간판의 모습을 안다. 우산을 쓴 친구들은 이를 쓸데없는 포착이라고 지적한다. 자아와 세계의 갈등에서 해결의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러한 상황은 우울증 환자만이 포착할 수 있거나 혹은 우울을 유발하는 기제가 된다. “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진실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다.” 인과를 알기 어려우며 자아의 힘에 의해 해결의 가능성이 어려운 문제 상황에 어울리는 것은 물이다. 언제부터 내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는 비..에 의해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이미 땅에 머무르는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신다. 하나뿐인 입들은 모두 막혀있는 사람들이 전당포에서 시간을 빌린다. 해결의 가능성이 말소된 상황을 덮는 것은 물이다. 문제는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며, 현장이 비에 젖는 모습을 홀로 포착하며 응시하는 화자는 외롭고 우울하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혹은 화자가 이상의 상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길은 언제나 젖어있을 것이다.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2012))
화자는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새를 키우지 않는 나는 새를 다루는 책을 집어 든다. 도서관은 책장을 넘기는 일을 하는 공간이지만 너무나 조용해서 그것을 실례로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어떤 구절을 소리 내어 읽는다. 구관조 씻기기라는 제목의 시에서 구관조는 등장하지 않는다. 햇볕이 비추는 것은 문조 한 쌍이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스스로 목욕하므로 씻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다“ 라는 문장을 읽는다. 새와 글을 읽고 있는 ‘나’와 그 글을 읽는 독자를 배반한다. 스스로 목욕하며 냄새도 나지 않는 새를 굳이 일부러 씻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물을 사방으로 튀게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은 새를 이미 씻겨놓는다. 씻길 필요가 없으나 씻어야 하는 배반적 운명은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거리가 젖어있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거울의 상으로 읽히는 새와 ‘나’는 물을 털어내는 운명을 공유하는 것처럼 인다. 그러나 비닐이나 랩으로 새장을 감싸 물이 튀지 않을 새의 경우와는 달리, 도서관에 밀폐되어있던 나는 거리가 ‘젖어있는 것’을 본다. 이 시의 모든 것은 서로 배반하며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처럼 존재한다. 책을 집어 든 이유도, 소리 내어 읽은 이유도 알 수 없다. 배반을 배반으로 바라보게 하는 인식의 가능성은 소거되고 오로지 포착만이 존재한다. 화자의 발화와 화자의 인식은 절대적인 거리감을 공유하며 결과적으로 대립과 배반은 은닉된다. 이것을 덮어버리는 ‘물’의 존재마저도, 배반을 읊는 화자에게 작용하는 양상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 인식과 정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두 시 모두 시인이 젊은 시절(20대)에 창작하였으며 ‘거리가 젖어있음’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갖는다. 두 시가 외부의 물, 즉 사회적 물을 응시한다고 보면 구체적 양상은 무척 다르다. 기형도의 시에서 물을 포착하고 응시하는 화자의 인식은 견고하다. 화자는 사건을 상기하고 거리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있으며 비와 비를 포함한 화자의 외부세계의 정체,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예언으로 다가올 행동을 예감한다. 황인찬의 시는 다르다. 화자와 화자를 둘러 싼 외부세계는 해체라고 할 만큼 인식이 소거되어 있다. 화자의 의지와 인식의 저편에, 혹은 인식이 소거된 곳에 발화가 존재하며 행동의 가능성이 소멸한 상태에 발화가 존재한다. 젖어있는 거리를 볼 뿐이다. 새를 키우지 않는 ‘내’가 새를 씻길 일이 없는 것처럼, 새가 결국엔 물을 털어내는 것처럼 가능성들은 알 수 없는 곳에 있다. 인식은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며, 부끄러운 듯 숨어 있다.
시인의 젊음이라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두 시가 대상과 주체와의 상호작용과 인식의 측면에 있어 이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자아와 세계의 대립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물에 대한 인식, 우울로부터 비롯된 물을 향한 시선의 차이는 발화 주체의 개별성이 갖는 차이를 뛰어넘어 1980년대의 젊음과 2010년대의 젊음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차이로 분석해 볼 만하지 않을까. 혹은 두 경우가 대상의 상실에 따른 우울과 자아상실의 우울 그 이후, 시대의 흐름과 함께한 우울의 서사를 비춘다고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