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 백발, 선택에 대하여

하고 싶은 것과 보이는 것, 백발에서 흑발로 돌아오는 여정

by 귤껍질

엄마는 결국 오랜 시간에 걸려 완성한 흰머리를 검게 염색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대뜸 “선생님 진보 지식인 같이 하고 다니시네요”, 했던 머리다.


미술 시간에 칭찬을 해줬더니, 미대로 진로를 잡아서 엄마에게 아주아주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 학생이라고 했다. 엄마는 “공부 잘하던 아이였는데, 내가 그 엄마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 뒤로는 학생들에게 괜히 미술에 재능 있다는 칭찬을 안 했어” 라며 연거푸 이야기했다.


친구과 이전 직장 동료들이 만나기만 하면 얼른 염색하라고, 제발 좀 하라고 성화였다. 가족들은 뭐라 안 하냐는 말에, “우리 남편은 오히려 잘 어울린다던대?” 했더니, 본인이 젊어 보이려는 술수라고들 했다.


할머니 맘 아파서라도 염색은 해야 한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흑백의 대비가 분명한 머리를 하고, 이제 염색 안 하겠다고 선포하고 다녔다. 그 시간이 지나고 흰머리가 차츰 내려와서 백발이 됐다.


거기에 동생이 사고 입지 않는 옷과 내가 더 들지 않게 된 가방을 메고, 엄마는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 만나자마자 흰머리를 하니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준다고 요즘 젊은이들 착하다고 블랙코미디 같은 말을 하고 푸하하 웃었다.


그러다가 웬만하면 아니라는 말을 못 하는,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하는 옛 동료의 반대가 백발 인생의 마침표를 찍게 했다. “이제는 염색을 해보려고, 다들 너무 아니라고 하더라고, 너희가 봐도 그렇지?” 라며 질문 같은 혼잣말을 하고, 그날로 염색을 하고 왔다.


그렇게 이제는 까만 머리를 한, 하지만 여전히 부시시한 파마를 어쩌지 못하고 결국 종종 따아버린 엄마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서울, 천안, 장항을 부지런히 오가며 하루도 쉬지 않는, 참으로 성실하고 궁금한 게 많은, 그리고 남의 시선에 까딱도 안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소녀가 되는 신기한 사람이다.


어느 연예인이 엄마와 너무 닮아서,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나도 엄마와 닮은 부분이 좀 있는데, 그래도 중년의 나이부터 백발을 하고 다니는 내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된다.


남보다는 나에게 중심을 두겠다는 선언 같기도 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올 용기로 읽히기도 한다. 결국 흑발 무리에 합류했지만, 무조건 젊음을 선택하기보다, 나이 듦을 선택해 볼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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