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귤껍질 Apr 12. 2024

우리 할아버지는 J인게 분명해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

할머니 간병하느라 할아버지가 너무 힘드시니, 함께 여행이라도 가자는 사촌언니의 말에 사촌 동생들 모두 좋다며 따라나섰다. 언제든 갈 수 있는 일박이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훨씬 특별해졌다.


주변에 말하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냐고 했다. 누군가는 엄청난 유교집안이냐고 묻기도 했다. 휴가를 눈치 보지 않고 쓰기 위해 팀장님께 말씀드리니, 주간회의 시간에 모든 팀원 앞에서 대견하다 칭찬을 받았다. 새삼 부모님을 빼고 손주와 할아버지만 여행을 가는 건 흔한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냥 좋은 생각 같아서 언니 오빠를 따라나선 건데, 칭찬까지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떠난 전주 여행은 할아버지와, 손주 중 셋이 함께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으니, 두 명은 할머니와 세 명은 할아버지와 함께 일박이일을 보내기로 했다. 전주에 한옥 숙소를 잡고 일요일 이른 새벽차를 달려 장항 할머니 할아버지댁에 모두 모였다. 아들 딸들과 조카가 대견해 모인 외삼촌들까지 10여 명의 인원이 같이 식사를 했다. 헤어짐이 아쉬워 울망거리는 할머니와 몇 차례 인사를 하고, 할아버지팀은 전주 숙소로 출발했다.

숙소는 사진 그대로였다. 작지만 고즈넉한 중정과 깨끗한 침구에 목재로 된 가구가 단정했다. 할아버지는 손주들 덕분에 호강한다고 했다. 일을 하면서 일본도 가보고, 국내 출장을 다니며 전주도 가봤지만 모두 몇십 년 전 일이라고 했다. 수십 년이라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긴 시간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정말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경험한 전주 풍경은 어땠을까?, 나중에 90이 넘어 손주들과 다시 온 기분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는데 상상도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손주들이 선별한 숙소에 체크인하는 것으로 시작된 전주 여행은 무척 알찼다. 첫날은 카페와 유적, 성당을 갔고, 둘째 날은 아침 식사 후 동물원, 카페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대망의 첫날 저녁 식사로 손주들은 온갖 먹거리를 쇼핑해 숙소에서 미니 뷔페를 만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메뉴는 정해져 있었다.


칸트에게 매일 산책을 하는 루틴이 있었다면, 우리 할아버지는 매일 돼지고기에 소주라는 몇십 년 된 행복 루틴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정신 차리자, 나는 하나다, 어디로 갈 것인가' 구호처럼 손주들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일과였다. 수년간 여러 안주를 테스트한 끝에 찾은 완벽한 조합이었다. 배가 부르기 전까지 적당량의 고기를 먹고, 소주는 정확하게 반 병에서 한 병을 넘기지 않게 마셨다. 그 뒤 평소처럼 일찍 잠자리에 드시자, 사촌들끼리 남아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여행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곁에서 본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일행이었다. 외출할 때는 항상 중절모를 썼다. 밥을 먹을 때 안경은 꼭 정해진 왼쪽 안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은 목걸이에 걸어서 항상 스웨터 안쪽으로 넣어두었다. 오빠가 휴대폰을 두고 왔을 때, 정신 차려야 한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는 모습에서는 손주들보다 더 기억이 또렷하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동물원에서 두 시간을 걷고 곯아떨어진 손녀 옆에서 꼿꼿하게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명절에 모이면 할아버지의 철두철미함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를 나누던 것이 생각이 났다. 할머니의 관리감독이 없는 첫 김장을 하고 온 아빠가 “너희 할아버지가 배추 125 포기를 심었다는 거야, 근데 그중 한 포기를 처남을 줬고 3 포기가 썩었대. 김장에 100 포기만 필요하니 남는 거 가져가라는데, 그런 장인어른의 배추를 가져올 수가 있겠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는 "할아버지 전기요금 이야기 알아?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는데, 그걸 안 쓰면 돌려준대. 근데 내가 번 것이 아닌데 받기가 좀 그렇다고 정말 딱 맞춰 쓰거나 1000원 밑으로 초과되게 사용하셔. 너희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다." 했다.

이런 철두철미함의 배경에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으며,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여행을 통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직접 경험하니 새삼 더 대단하고 닮고 싶어졌다. 90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항상 막막한 일이었는데, 우리 할아버지처럼 늙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이런 이야기를 언니랑 오빠에게 하니, “그럼 새벽마다 일어나서 운동해야 해, 2월 칼바람이 불어도. 할 수 있겠어?”라며 웃었다. 운동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노력은 해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낭만적인 삶을 산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