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가 읽고 씀 - 3월
의욕은 넘쳐흘렀다. 하필이면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두 달 중 하나인 3월이었다는 게 문제였지. 게다가 아이들의 새 학기 시작과 발목 제대로 잡고 늘어진 반려질병 탓에 계획했던 일의 반도 못했다. 숫자 하나, 쉼표 하나, 화폐 단위 하나가 중요한 일이라 회사에서는 4n년 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집중하고, 좀비 상태로 퇴근하여 집에 와서는 거의 누워만 지냈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은 잔뜩 빌려와 놓고 대부분은 채 펴보지도 못하고 반납했다.
자그마치 열네 번의 취켓팅(취소표를 잡아서 예매하는 일) 시도 끝에 명당자리 잡기에 성공한 인모님의 공연이 있어서 누워서는 계속 그의 연주만 들었다. (이 이야기도 '직장인의 가성비 문화생활'에 쓰려다 포기. 그 벅찬 마음과 감동의 후기를 제대로 묘사하기엔 내 두뇌의 가동범위가 초과되었다. 조만간 써야 할 텐데...)
그 와중에도 읽고 쓴 나 자신 칭찬해 본다!
3월에 필사한 책
필사는 계속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로 하고 있다. 십 여분 남짓 글씨 쓰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이어나가고 있다. 글씨도 처음에 비해 괴발개발 난리도 아니다. 필사를 하면서 계속 생각한다. 다들 필사를 찬양하는데 나만 그 맛(!)을 모르는 건가. 요즘은 그냥 의무적으로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쓰는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늘도 써보자!
3월에 읽은 책들
1. 공익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그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의 후속 편. 전작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그래도 역시 빵빵 터지는 재미가 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저승에서는 / 말도 걸지 말라는 / 아내의 엄명".
남편! 느드 으는측 흐즈므르.
2.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편역,『헤르만 헤세와 인생 산책』
헤르만 헤세의 책들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글들을 남겼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편역자인 김이섭 님이 헤세에게 가진 애정이 보이는 듯하다. 많은 글들 중에서도 좋은 것들만 모아 엮었으니 필사하기에도 좋아 보인다.
3. 장강명,『산 자들』
에세이 모임의 문우가 소개하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의 책이라 읽었다. 하이퍼리얼리즘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딘가에 있을 법한 (외면하고 싶은) 단편 소설들의 집합. 이 책은 과연 소설인가 르포인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한 경계를 담담하게 묘사하니 더 실감 났다. 현실에서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역할은 없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겐 피해자였던 이가 누군가에겐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 표지마저 예술이다.
4. 클레어 키건,『이처럼 사소한 것들』
잔잔하다. 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다. 남과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 그게 나와 내 가족을 힘들게 하는 길이더라도 옳은 길로 가려한다는 것. 길지 않은 이야기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가 주인공이었더라면 그저 쉽게 방관자의 길을 택했으리라.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작품'이기에 금세 읽히지만, 역자와 추천한 사람들의 말들처럼 2회독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책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영화도 추천한다.
5. 이희영,『페인트』
예전에 읽었다가 첫째와 함께 읽기 위해 재독. 부모와 자식 관계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픽션일지라도 이 고정관념을 뒤집은 소설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 면접'을 하면 나를 엄마로 받아주려나? 아직까지는 "Yes!"일 거라 생각하는데 사춘기가 되어서도 그럴지는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자신이 없네.
6. 김영민,『가벼운 고백』
본문보다 '드립'에 관해 쓴 발문이 더 마음에 들었다. 본문에서도 몇몇 마음에 드는 구절은 있긴 했는데, 작가가 사실은 꼰대지만 근처 어디메쯤에 있으면서 "난 아닌데?"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대놓고 꼰대보다는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는 꼰대가 더 낫지 않나? 이러는 나도 꼰대다. (꼰대는 꼰대를 알아본다.)
7. 유은실,『순례주택』
너무나 멋진 그녀 순례씨.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진 않는다. 수림이한테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부모)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씨처럼 살아보자. 가벼운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사뿐히 날아와 내려앉는 책.
8. R. J. 팔라시오,『화이트버드』
이 책도 그래픽노블이다. 이야기 속의 배경과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그래서 그들의 비극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일제 강점기가 있었다면, 그들에겐 홀로코스트가 있었지. 그 속에서도 용기와 사랑은 무너지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생생한 모습이 책 이상의 감동을 주는 동명의 영화도 꼭 보길 권한다. 작가의 전작인 '원더'와 함께 아이들과 책과 영화 모두 볼 예정.
9. 에드워드 애슈턴,『미키 7』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을 보기 전에 읽은 책. 왜 원작은 '7'인데 영화는 '17'일까 했는데, 둘 다 보고 답이라 짐작되는 것을 찾았다(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책과 영화 모두 나쁘지는 않았는데, 잘 모르는 세계의 설정이다 보니 영화로 보는 것이 이해가 더 쉬운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캐릭터는 영화가 더 마음에 들었고, 결말은 책이 더 마음에 들었다.
10. 김민섭,『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김민섭 작가의 신작이라 읽었을 뿐, 이미 그의 저서와 SNS를 통해 본 이야기라 엄청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그 속에 담긴 마음까지 익숙한 건 아니다. 작가가 항상 강조하는 '다정함'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님들과도 '다정하고 선한 연결'로 이어지고 싶다.
11. 사이토 다카시,『니체의 자존감 수업』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껴주며, 긍정적인 자존감을 지키게 하는 니체의 뼈 때리는 글 모음. 스스로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들어 나약해진 육체 탓에 힘들었던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니체의 철학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책이라 추천한다.
12. 도야마 시게히코,『생각의 도약』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테디셀러. '정리의 기술'에 대한 작가의 노하우는 40여 년을 뛰어넘은 지금도 유효하다. 요즘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있다. 그래서 어떤 정보를 기억하고, 어떤 정보를 버려야 하는지 선택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작가의 방법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첩을 이용한 아이디어 정리와 글쓰기 팁은 요즘 소재 고갈로 허덕이는 나에게 좋은 조언이 되었다.
13. 김보경,『아이의 행동이 저절로 바뀌는 훈육의 정석』
작가는 저서를 읽기 전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고 있었고, 종종 올리는 콘텐츠를 통해 육아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심지어 미국에 있는 작가에게 Zoom을 통해 상담을 받기도 했다). 나와 동년배들은 '훈육'이라고 하면 '처벌'과 동의어 내지는 유의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훈육은 처벌이 아니다. 육아의 최종 목적인 '아이의 독립'을 위한 훈육법이 때로는 작가의 경험담과 때로는 객관적인 연구결과와 함께 서술되어 있다. '아이의 행동이 저절로 바뀌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내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읽었다. 일단 나부터 잘하자.
14. 마쓰나가 K 산조,『베리에이션 루트』
이 달의 소설로 선정되어 읽은 책. 흔히들 인생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등산에 비유하는 얘기를 한다. 이 책은 거기에 '나만의 방식'까지 더한다. 등산을 싫어하는 나는 심지어 산책로가 아닌 '베리에이션 루트(정해진 길이 아닌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는 등산법)'를 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회사원이라면 공감할 법한 내용이라 어렵지 않아 쉽게 읽히긴 한다.
15. 김수현,『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몸도 안 좋았고, 회사일과 집안일로 유난히 힘들었던 3월의 나를 위로해 준 책. 다정한 위로와 센스 있는 농담, 귀여운 일러스트가 행복하라며 나를 응원해 준다. 이 책을 추천해 준 지인은 작가의 전작『나는 나로가 살기로 했다』가 더 좋다고 하던데 위로받을 일은 아직 남았으니 4월에는 그 책을 읽어보려 한다.
이렇게 써 놓으니 또 생각보단 제법 많이 읽었지만 숫자만 많지, 얇거나 가볍게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계속 어지러우니 집중이 어려워서 정작 읽고 싶던 책들은 제대로 못 읽고 다음 달의 나에게 미뤄두었다. 날씨도 나도 아직은 봄이지만 봄이 아닌 것 같다. 4월에는 진정한 봄날을 누릴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책 이미지의 출처는 모두 교보문고 (https://www.kyobobook.co.kr )
영화 이미지의 출처는 모두 CGV (https://www.cgv.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