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글의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 제가 상담치료 중인 병원에 그간의 <의무기록>을 요청했습니다.
A4용지 80여 장에 이르는 3년 4개월간의 기록, 초진기록부터 찬찬히 읽어보니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정신적인 타격이 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부터,
그 당시에는 비수가 되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가물가물한 일까지.
그리고 <의무기록>을 보고,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나는 ADHD가 맞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찾아가 종합 주의력검사(CAT)를 한 개인병원에서 써준 소견서에 ‘Inattentive ADHD 가능성을 고려함.’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는 것입니다.
* Inattentive ADHD : ADHD의 3가지 유형인 1) 부주의형, 2) 과잉행동-충동형, 3) 혼합형 중 '부주의형'
그때는 왜 못 봤을까요?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갑자기 떠오른 생각으로 자리에서 벗어나 생각난 일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만지기도 합니다.
또, 아이들에게 “문제에서 뭘 물어보는지 끝까지 잘 봐.”라고 이야기하면서,
저도 문제를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아이들 앞에서 티 낼 수는 없고 내심 놀랍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글자를 소리 내어 읽고 있으나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내용파악이 안 되는 일도 잦습니다.
A라는 일을 하다가 B라는 글감이 떠올랐는데 B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해 내거나 적으려고 하면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마치 공기 중에 하얀 연기를 잡으려는 순간 사라지듯 말이죠.
이제는 이런 나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그럴 수 있지~!’하며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크고 단단하게 키워보려 합니다.
그럼에도 깜빡증이 좋은 점도 있습니다.
기분 안 좋았던 일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고, 완전히 잊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모님께서 저를 양육하신 방식,
다소 냉정할지라도 감정을 어루만지기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하신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고이 접어 넣어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모도 나와 다른 존재이기에 생각도, 언행도 ‘다름’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부모일지라도 각자의 사정이 있고,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자식을 이만큼 키워놓는 것도 보통일이 아님을 잘 아니까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마흔 살 12월에 해본 지문검사 결과에도 나왔듯이,
지구력이 1% 부족한 제가 꾸준히 글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게을러져서 글쓰기를 멈추기도 했고
‘과연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에 글쓰기를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집 근처 구립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RGPI(Rohen Grow Potential Inventory) 검사를 통해 알아보는 <나를 아는 글쓰기>라는 2회, 총 4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신청했습니다.
강사님이 소개하신 ‘일기로 쓸 법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중)'는 글을 통해 다시 용기를 얻어 시간 나는 틈틈이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RGPI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자원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안된 ‘자기 발견을 위한 도구’입니다.
99문항으로 된 온라인 검사로 아래 3가지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1. 중심가치 : 행동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내적 기준인 (독립, 조화, 이타, 질서, 안전, 지위, 성취, 재미)
2. 방어성향 :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 (분노, 우월, 조종, 회피, 고립, 의심, 특이, 양면, 연기, 의존, 완벽, 억제, 열등)
3. 정서상태 : 현재의 마음 에너지인 (0~100%)
이 중 정서상태는 우리나라 평균이 62%, 저는 75%로 3~4년 전, 가는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긴 터널에서 헤매던 저를 생각하면 정말 큰 변화입니다.
참여자 중 한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마음 에너지를 끌어올리셨어요? 전 30%인 데."
마지막 시간에 각자 다른 상처와 고민을 안고 온 수강생들 앞에서 각자가 쓴 글을 낭독했는데, 그분도 저처럼 방어성향으로 완벽이 높고 번아웃으로 인해 휴직 중이라고 했습니다.
“여행도 다니고, 책도 읽고, 상담치료도 받고, 글도 쓰고, 많은 것을 했어요. 근데 그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살고 있구나. 나만 왜 그러지.’라며 남들과 비교해서 힘든 것도 큰 것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괜찮아. 지금은 그냥 푹 쉬어.’, ‘그럴 수 있어.’라고만 해줘도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제 경험을 나누었을 뿐인데 그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너무나도 사적인 ADHD>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산수유, 매화, 목련 등 봄을 알리는 꽃이 피는 초봄이었는데,
에필로그를 쓰는 지금은 매미가 힘차게 우는 뜨거운 여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꽁꽁 얼었던 제 마음도 녹아내려 이제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뜨거움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글쓰기의 힘,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인 것 같습니다.
*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 30분 이상 뛰었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 상태나 행복감과 비슷하다. 다리와 팔이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기며 피로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힘이 생긴다. (출처 : Naver 국어사전)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평온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생리 전 감정기복도 거의 없습니다.)
가끔은 '이 마음의 평화가 언제 깨질까?'라는 불안이, 제 머리의 문을 열고 빼꼼히 들어오려고 합니다.
이제 그럴 땐,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 인식(Emotion labeling)해서 불안함이 내 마음으로 내려와 평온함을 휘젓지 않게 단속하고 있습니다.
일을 마무리하기 어려워하는 ADHD 성향을 극복하고, 결국 해낸 나를 '격하게 칭찬'하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걱정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은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나를 응원해 준 남편과
글 쓰는 내 주위를 오가며 “엄마 뭐 해? 뭔가 수상한데......”라면서도 잘 기다려준 Y, S에게 무한한 감사와 애정을 표합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그리고 부디,
특별한 우리 아이들이
ADHD라는 진단명이 없었던 시대처럼
새롭고 다양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존재로서
그 잠재력을 인정받는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ADHD를 자연의 적응적 특성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