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돌아온 탕자
2023년 1월 4일 수요일, 아침 열 시.
눈을 뜨자마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에 손을 뻗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은 흐릿했다. 머릿속도 몽롱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함께 책 모임을 한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 읽기’ 내가 제안한 일종의 놀이였다.
내 침대의 헤드 위에는 물건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는 읽지 않고 쌓아둔 책 중에서 신중하게 몇 권 골라 그 위에 정렬해 두었다. 그리 가지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책 읽는 사람의 태가 나는 그런 모양이었다.
줄지어 놓여있는 책 중에 어떤 책을 고를까 잠시 고민했다. 책은 두세 권씩 겹친 상태로 아홉 줄 가량 늘어서 있었다. 나는 언젠간 저 책들을 다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전시된 책들은 언젠간 나도 저 사람에게 읽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밝은 눈과 명료한 정신으로 책을 볼 때면 읽을 자신이 없어지곤 했다. 집에 있는 책의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였을까? 고전문학, 심리학, 소설, 원서, 필사집,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 웬만한 종류의 책들은 다 있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너무도 방대한 양의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잠시 멍해지는 것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는 책을 보면서 한동안 정지 상태가 되곤 했다. 고전문학을 쭉 읽고 다른 장르의 책으로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야 할까?
사실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예전처럼 집중해서 책을 읽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책 한 권을 뽑아 들면 그 자리에서 세네 시간이면 다 읽곤 했다. 십 대 때 내 집중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한번 방문을 닫고 책을 읽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책만 보였고, 책 속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부터 이상해졌다. 한 줄 한 줄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게 지루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다 이내 책을 덮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펼치는 것도 어려워졌다. 책의 물리적 무게가 마음속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책을 읽기보단 빤히 바라만 보게 되었다. 머릿속으로만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책은 책장에 쌓여갔고, 독서에 대한 내 마음속 부채도 쌓여갔다.
책 읽는 게 어려워진 건 삶이 책만큼, 아니 책 보다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합리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합리적인 활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복잡했다. 인간관계는 어릴 적처럼 순수한 마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고작 기계처럼 일하려고 나는 그렇게 학문의 전당에서 청춘을 바쳐가며 공부했던가? 회의감에 휩싸였다. 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는데 부모님과 사회는 다른 누군가를 만나 인생이라는 항해를 함께 하라고 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보다는 가벼운 핸드폰을 집었다. 핸드폰 속 세상은 가벼웠다.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SNS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은 즐거운 것 같았다. 아, 나 빼고 말이다. 나도 물론 행복한 일이 있을 때는 SNS에 뒤질세라 기록했지만 글쎄, 내 삶보다 다른 사람의 삶이 더 재밌어 보일 때가 많았다. 짧고 자극적이며 어쩐지 공허한 뒷맛을 남기는 SNS 속 세상을 유영하는데 정신이 빼앗긴 나는 책을 들추지 않았다. 무거운 오프라인 세상과 가벼운 온라인 세상 속 어딘가에 위치한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핑계인 걸 잘 알면서도, 한번 등 돌린 신자가 다시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기 힘든 것처럼 그렇게 자꾸 책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한번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책 펼치기 놀이’ 발단은 앞서 언급한 책 모임이었다. 한 출판사의 독자 편집자가 되어 에세이 한 권을 편집했다. 팀을 이루어 세 달여를 한 권의 책을 만드는데 보냈다. 편집 과정을 경험하는 것도 재밌었지만, 그만 우리 조가 좋아져 버렸다. 책을 향한 순수하고도 간절한 열망이 가득한 사람들, 이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눌 때면 옛날 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 책에 의지했던 시절이 생각났나보다. 평소에도 놀이공원에 가듯 찾았던 서점이었지만 유난히 마음이 힘들었던 열여덟 살의 나는 어느 날, 발길 닿는 대로 서점에 들어섰다. 운명처럼 한 권의 책을 만났고, 우연히 펼친 그 책 속에서 나를 구원하는 글귀를 만났다. 그렇게 내 인생의 책 펼치기 놀이는 시작되었다.
쉬이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사뭇 경건하게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고민한 후에 집어 든 책은 태지원 작가의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이었다. 책의 옆 부분이 나를 향하도록 책의 방향을 다르게 잡았다.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종이의 결을 느껴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얇은 종이의 부스러질 듯 바스락거리는 느낌. 오랜만에 그 감촉을 느껴보았다. 두 손가락으로 책의 어느 부분을 펼칠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한 군데를 골라 힘껏 책을 펼쳤다. 펼친 부분은 231쪽,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문구는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초라한 행색의 아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가까이 달려가 포옹한다”였다.
다시 한번 책 속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는 나를 열린 마음으로 안아주고 받아들여주겠다는 걸까? 그렇다면 날 받아준 건 책의 정령일까, 날 기다리고 있었던 책 속 문구일까, 자신의 말과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적어 내려간 작가의 마음일까, 사실 합치되길 바라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나의 마음일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책은 ‘멀리서 오는 초라한 행색의 나’를 바라보다 포옹해 주었다. 포옹해 주었다는 건 그 속에 포함된 말로 내 마음을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손을 내민 건 나였지만 책은 자신 안에 품은 글로 기꺼이 나를 안아주었다.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초라한 행색의 아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가까이 달려가 포옹한다.”
태지원,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231쪽
렘브란트 판 레인, <돌아온 탕자>, 1668-1669년, 캔버스에 유화, 264.2x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