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se Jul 15. 2020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개발자

그는 가끔 농담을 한다

# 나를 너무나 힘들게 한 개발자

HW(Hardware)는 선택하는 부품에 따라 SW(Software)사양과 제품 원가에 영향을 미치고, 설계 구조 또한 쉽게 바꾸기 어려워서 프로젝트 초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젝트 Kick-Off 전부터 개발 중반인 지금도 HW부서는 매일 들락날락한다. 제품의 큰 뼈대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조업 PM에는 HW 개발자 출신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아는 HW개발자들은 거칠면서도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깔끔한 인상에 말수가 별로 없고 온화하지만 사적인 얘기를 하거나 너스레를 떠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벽이 있는 느낌이 강했는데, 내가 웃으며 농담을 해도 겨우 잔잔한 미소만 뗬던 분이다. 이것저것 물어보면 귀찮았을 텐데도 항상 차분히 알려주셨다.


그는 개발부에 사양 검토를 요청하면 OO부서의 자료가 없어서 확인 못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또 실무자들이 귀찮아하는 세부적인 자료가 필요하거나, 자료 전달을 빨리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때마다 나에게 그 역할(일명 뻐꾸기. 완전 bird된)을 요청했다. 그럼 난 바로 그 부서로 찾아갔다. 개발자 기술용어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miss communication이 많았고, 이 부서 저 부서에 메일을 보내고 연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M부서 이사님께서는 이런 나의 모습이 답답하셨는지 "OO대리 더 이상 말하지 마! 이해 못 하겠으니까. 그 OO선임(HW개발자) 직접 와서 말하라 그래요."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때 정신이 들었다. 어떻게 서든 일정 안에 내가 원하는 사양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서서 스스로를 힘들게 한 것도 있었다. 나도 PM은 처음이었기에 이건 PM 업무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도 한 몫했다. 그분께 개발부끼리 대화하셔야 서로의 필요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뒷머리를 계속 만지시며 머쓱해하셨다.  


하지만 곧 이 분과 언성을 높이게 된 일이 있었다. 내 주 업무인 개발 일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체크를 할 때였다. 그런데 곧 다음 개발 일정이 들어가는 시점에서 갑자기 그분은 다음 개발 일정이 짧다면서 늘려달라 하셨다. 초반에 날짜를 일일이 보여드리며 협의하였고, 몇 주 전부터 다음 개발 일정을 공지하며 무리 없는지 체크해왔던 터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제품군으로 경험은 적고, 인력도 없고, 일정은 짧고... 밤낮으로 열심히 하시는 그분의 답답한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나도 일정을 더 늘리고 싶었지만 이미 고객사와 한차례 협의해 좀 더 늘린 일정이었다. 여기서 더 늘리면 고객 신용도 떨어지고 제품 시장 진입에 늦어지게 되어 판매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일정을 늘리다 보면 초반에 일정을 설정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늘려달라. 나는 안 된다. 언성을 높이며 몇 차례 반복하다가 다른 일정을 줄이고 다음 개발 일정을 조금 늘리는 것으로 협의하고 마무리되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다 보니 그 분을 너무 싫어하게 됐다. 그보다 내가 한참 어리고 직급도 낮았지만 업무와 일정을 이끌어야 했기에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때부터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실없는 웃음을 보이지 않고 업무적으로만 커뮤니케이션했다. 하지만 개발 중 발생되는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또 바보같이 금세 안 좋았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너무 기쁜 마음 그대로를 표현하곤 했다. 최고라며 그분을 향해 활짝 웃고는 돌아서서 가벼워 보였을 나 자신을 자책하곤 했다. 저 미운 사람에게 다신 웃어주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 사소한 행동에 허물어지는 미움

어느 날 복도에서 그를 보았다. 안 그래도 그에게 말할 것들이 있었는데 이 때다 싶어 바로 그를 불렀다.

나 : 엇 선임님!
HW 개발자 : 왜 저한테 와요. 어서 가던 길 가요.
나 : 하하~ 선임님, 업무 얘기 쏼라쏼라~


그는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분명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거였다. 평소의 그는 내가 불렀을 때 '네, 무슨 일 있나요.'라는 대답밖에 안 하는 사람이다. 그가 농담이라는 걸 할 줄 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말이 장난인 줄 몰랐다. 업무 얘기를 끝내고 나오면서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 때부터 그는 나에게 이런 장난을 자주 치곤 한다.


전 날 너무 울어서 퉁퉁부은 눈으로 회사에 출근한 적이 있었다. 회사 탕비실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내 눈을 보고 놀라시면서 왜그러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옆에 있던 친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분은 한참 날 바라보시면서 뒷머리만 만지고 계셨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옆에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라니 느껴졌다. 그의 머무름은 그 날 받은 가장 큰 위로였다.


요즘 그분께 질문을 하면 더 자세히 알려주고, 개발 요청을 하면 곧바로 대응을 해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히려 가끔은 나를 먼저 도와주려고 하시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놀랄 때가 있다.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애쓰고 있음을 서로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사람이 무슨 죄냐고요. 바쁘게 몰아붙이는 회사가 문제지.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개발자다. 하지만 가장 마음이 가는 애틋한 개발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품 탄생 과정을 안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