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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광 Nov 08. 2021

은희 1

부서지지 말아라

엄마가 사라졌다.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들기 전 엄마는 당부했다. 집안 곳곳에 있는 살림살이 위치와 빨래하는 법, 가스불은 항상 확인하라고. 엄마는 3살 터울 남동생 이야기를 할 때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딸에게 미안함 따위는 없어 보였다.



13평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 잡동사니로 가득 찬 베란다 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얼굴로 내려앉는다. 어제의 엄마 모습은 그립지도 않았다. 언제 엄마가 있었는지 무감각했다. 오히려 엄마가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그들의 싸움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니까. 칼부림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며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니까. 부스스 잠에서 깬 동생이 엄마의 행방을 묻는다. 모른다고 했다. 동생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베이비붐 세대인 엄마 아빠는 배움이 부족해 변변한 직장도 없었다. 노동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부부였다. 언덕배기 월세방을 전전하며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살았다. 100을 모으면 집값은 1000이 되고 1000을 모으면 집값은 10000이 되었다. 힘든 노동일에 찌든 아빠는 술로 불만을 토해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들어와 엄마에게는 욕설과 폭력을 휘둘렀고 살림살이를 집어던지고 깨부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들에 이골이 났는지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아빠에게 맞서 싸우는 동생은 언제나 사시나무 떨듯 바들거리고 있었다.

집주인 눈에는 얼마나 가시였을까. 아빠의 난동이 있은 다음 날이면 엄마는 주인 할머니에게까지 시달렸다. 세 들어 살면서 부끄럽지도 않냐는 둥. 주인인 본인이 남들 보기 창피하다는 둥. 앙칼지고 드센 주인 할머니는 엄마를 쏘아붙였다. 그럴 때면 아빠나 주인 할머니나 별반 다를 게 없는 한통속이었다.

어느 날 복수심에 불 타올라 주인 할머니를 괴롭힐 계략을 짰다. 늦은 밤까지 잠에 깨어 있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할머니 신발 한 짝을 몰래 훔쳐 재래식 화장실 깊숙이 던져 버렸다. 설령 그것을 본다 해도 건져올려 신을 수 없게끔. 한 짝만. 새 신발만 골라 똑같은 수법으로 여러 번 그 짓을 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기가 막힌 상황에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앙칼진 목소리로 우리를 향해 모진 소리를 퍼부었다.




그러고도 수없이 월세방을 전전하다 부모님은 결혼 15년 만에 허름한 아파트를 장만했다. 뛸 듯이 기뻤다. 학교를 파하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부러워했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없지만 상관없었다. 주인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 충분했다.

집이 주는 안정감과 평온함이 엄마와 아빠의 거리도 좁혀줄 거라고 믿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건가 보다. 엄마는 우리 남매를 조금 나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고 아빠와의 이혼을 계획하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사라질 줄 알면서도 붙잡지 않았던 건 엄마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살기 힘들고 못 만나도 돈은 모으자고 했던 기 참말로 잘한 거 같데이. 이 나이에 여자 셋이 싱가포르를 우찌 가노. 안 글나?"

"은희 니는 맨날 여행지가 바뀌더만, 니가 정한 거 아이가? ㅋㅋ"

"내가 얼매나 가고 싶은 데가 많으모 그리하긋노? ㅎㅎ"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있나? 우리 셋이 떠나는 기 중요하지."

"맞다. 맞다. ㅋㅋㅋㅎㅎㅎㅎ"

인천공항 로비에 앉아 여권을 손에 꼭 쥔 채 이구동성으로 맞다를 외치며 깔깔거리는 세 여인. 아줌마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물개박수 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단함은 주름진 얼굴에 묻었다. 희끄무레한 흰머리가 세월을 말해준다.

"은희야, 니 남편이 우찌 보내주더노? 우리는 니 때문에 여행 못 갈 줄 알았다."

"언제까지 그 인간한테 목메고 살 낀데. 내가 그런 개자식을 만날지 어찌 알았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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