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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Jun 10. 2023

열 명의 인디언 꼬마가 데본(Devon)을 여행했네

영국여행

오래전, 잉글랜드 남서부의 데본을 여행했을 때, 애거서 크리스티가 태어나 자란 도시 토키(Torquay)에 간 적이 있다. 크리스티 여사의 오랜 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방문이었다. 하지만 정보를 모으고 계획을 꼼꼼히 세우는 스타일과 거리가 먼 나는, 토키 박물관 안에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갤러리를 방문했을 뿐 그밖에 크리스티와 연관된 장소들을일일이 찾아다닐 생각은 하지 않았다.


토키를 떠날 즈음 뒤늦게 어느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 덕분에 크리스티의 생애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들을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데본의 곳곳에 크리스티의 흔적과 그가 살았던 옛 시대의 영국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사진에 있는 Pavilion은 크리스티가 즐겨 가던 공연장이었다. 1976년 문을 닫은 후 아이스 링크, 쇼핑센터로 쓰다가 지금은 수리를 위해 폐쇄된 상태라고


무거운  들고 다니는 것이 질색이라서 여행지에서 기념품도 거의 사지 않는다. 그런 내가 책을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외적인 일이다. 애석하게도 사진들이  평범했고 기행문 스타일로  글도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냥은   없었을 장소들을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했다. 더구나 쉽게 구할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님은 분명했기에 냉큼 구입했고, 지금까지도  책꽂이에  보관되어 있다.


크리스티가 살았던 시대에 토키는 귀족적인 분위기의 부유한 휴양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도시는 이제 너무 낡아 보여서 안쓰러운 느낌까지 자아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이곳은 이미 과거에 속한 장소였다. 영국이 늘 그렇듯 날이 흐려서 분위기가 더 가라앉아 있었다.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는 바닷가에서 멀어지면 점차 경사가 가팔라지는 언덕이 나왔다. 바닷가 건물들은 고풍스러웠고 언덕에는 조용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내가 살지도 않았던 먼 외국의 옛 시절에 향수를 가진다는 것이 이상하지만(그것도 냉철히 따져보자면 제국주의의 선봉에 섰던 나라의 과거에 대해), 토키를 비롯해서 데본의 여러 장소들은 내게 묘하게 그리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크리스티 자신이 애쉬필드(크리스티가 태어난 집 이름)에서 보낸 유년의 추억을 소설 속에 그리면서 그 걱정 없던 어린 시절과 시대의 비극 속에 몰락하는 사람들의 삶을 대조시켰던 것처럼, 어떤 낡은 것들은 아름다움과 서글픔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추리소설의 특성상 등장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개성이 있어서 헷갈리지 않았던 것이 (트릭과 추리 외에도) 크리스티 소설의 강점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 소설들은 개인의 삶을 넘어 시대의 기록들이기도 하다.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생생하고 의미심장한.


마지막 사진은 애거서 크리스티 갤러리가 있는 토키 박물관(크리스티 갤러리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크리스티의 생애와 작품세계가 정리되어 있고 사진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데본>의 작가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무대가 된 섬을 버 섬(Burgh Island)이라고 쓴다. 근거는 나와있지 않다. 어차피 소설은 팩트 모음이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섬을 특정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할 것이다. 환경과 상상력이 만나는 어떤 지점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일 테니. 다만 ‘크리스티 월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간 것이겠지. 책에 실려 있는 버 섬의 광경은 과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사진과 글을 보니 이 섬은 사실 호텔과 인가들이 있는 꽤 번잡한(?) 섬이다.



집 한 채가 있을 뿐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섬이라는 소설의 설정에 더 근접하는 곳은 BBC에서 제작한 2015년 드라마의 촬영지 뮬리언 섬(Mullion Island)인 것 같다. 이곳은 버 섬보다 더 서쪽, 거의 잉글랜드 남서쪽 끄트머리 가까운 곳에 있는 (이곳은 사실 데본이 아니라 콘월이다) 무인도인데,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임시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섬은 조류 관찰과 연구를 목적으로 보호되고 있어서 일반인은 방문할 수 없다. 다만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는 육지 반대편의 뮬리언 코브(Mullion Cove)는 둘러볼 수 있다고.*


뮬리언 섬 (출처 : 구글링) 실제로는 이렇게 작고 육지에서 가까운 섬인 것 같은데 드라마에선 더 커보인다.


BBC의 3부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그때까지만들어진 영화/드라마 버전 중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각색을 많이 하지 않고 대부분 원작과 동일하게 전개된다. 중간중간 거의 호러에 가까운 분위기가 날 정도로 어두운 심리묘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이것 또한 원작을 충실히 계승한 방식이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연출도 좋지만 무엇보다 캐스팅이 훌륭하다. 워그레이브 판사 역의 찰스 댄스, 필립 롬바드 역의 에이단 터너, 베라 클레이슨 역의 매브 더모디, 에드워드 암스트롱 역의 토비 스티븐스 등 모든 배우들이 등장인물들을 그야말로 살아있는 듯 연기한다. 특히 롬바드와 클레이슨 역 두 배우의 캐릭터 표현은 감동적일 정도다. 애초에 추리소설에 캐릭터가 이렇게 생생할 일인가? 수수께끼 풀이의 차원을 넘어 크리스티의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계속 읽히고 또 영화나 드라마로 계속 만들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름다운 듯 황량한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뮬리언 섬이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작은 관목과 풀들로 뒤덮여 있고, 바다와 맞닿은 곳은 거친 절벽으로 끝난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너무나 ‘영국적인’ 이 풍경은 ‘크리스티 월드’의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BBC 드라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등장하는 뮬리언 섬(내가 캡처함)


* 정보 출처 : http://www.findthatlocation.com


- 토키의 ‘Agatha Christie Mile’ 정보.

https://thirdeyetraveller.com/agatha-christie-mile-torquay-map-devon/


(여행시기 :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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