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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Jun 18. 2023

하동에서 남해로 - 평사리, 한산사, 섬이정원

국내여행

# 평사리 최참판댁


최참판댁이라고 이름 붙어 있지만 이곳은 사실 2004년 드라마 촬영 때 만든 세트라고. 경치는 좋지만 영혼은 없는 곳이라고 해서 큰 기대 안 하고 갔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올라가는 길은 토속적인(?) 관광지 스타일의 가게들이 많이 있었고, 옛날 양반댁이 이렇게 높은 곳에 있었을 리 없다 싶어서 시큰퉁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꽤 잘 지은 집이었다. 단순한 세트라고 보기엔 안정적이고 견고했고, 그 사이에 세월이 흘러서 적당히 낡은 느낌이 묻어났다. 특히 정원의 크고 오래된 나무들은 이곳을 단순히 허구의 장소라고 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방안에 있는 가구들도 실제 가구 같았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옛 가구를 가져온 건지, 이후에 갖다 놓은 건지는 몰라도.



어쩌면 애초에 이렇게 계속 관광지로 쓰려고 튼튼하게 지으라고 주문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영혼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드나들고 앉았던 자리에 마루가 반질반질해지고 나무가 자라고 땅이 다져지면서, 영혼은 자라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드라마 촬영지였다는 사실에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것이 이곳을 즐기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 사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토지>의 애독자였다. 끔찍한 사건들이 몰락하는 양반집안을 덮치는 이 소설의 전반부에 10대 소녀가 왜 그렇게 몰입했는지는 모르겠다. 서희가 길상이와 결혼해서 북간도에서 부를 축적하는 대목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평사리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이 내 기억에 더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평사리에 와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하는 지명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듯. -


꼭 집 구경이 아니라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만으로도 와 볼만 한 곳이었다. 낮은 담장 너머 평사리 들판이 푸근하게 펼쳐졌다. 들판을 둘러싼 산등성이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고, 멀리 가물가물 섬진강 줄기가 보였다.



# 한산사


지나가다 들러본, 최참판댁에서 가까운 절. 높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지은 특이한 절이었는데, 절 그 자체보다 섬진강과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절경이었다. 최참판댁에서보다 더 높이 올라왔기 때문에 더 탁 트인 경치가 펼쳐진다. 대웅전도 높이 있었지만 거기서 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다 올라가니 절집이 하나 더 있는 작은 공간이 나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다리가 좀 후들거렸다. 멀리 보이는 섬진강은 수량이 적고 모래가 많아 보였다.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왔던 것 같은데 아직도 가물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제 갔던 습지공원 쪽보다 이쪽이 더 상류인데, 평지가 더 넓어서 마치 하류처럼 느껴졌다.



# 남해 섬이정원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해로 들어갔다. 어제 저녁 먹으려고 남해로 잠시 내려오긴 했지만, 낮의 남해를 즐기진 못했기에 오늘 다시 온 것. 서울에서 멀수록 쾌적하다는 것이 진리이긴 하지만, 사람이 적은 곳일수록 여행 인프라가 안좋아진다는 것이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치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한가한 시골이면서도 예쁜 가게와 세련된 숙박 시설들이 있는 남해는 정말 특별한 곳이다. 나름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는 우리가 보기에, 남해처럼 자연이 아름답고 붐비지 않으면서도 사람 사는 동네도 단정한 곳은 찾기 어렵다.


4년 만에 온 남해는 신기하게도 예전과 거의 똑같았다. 더 관광지스럽게 변하지도 않았고 더 낙후되지도 않았다. 케이블카나 짚라인 같은 요즘 유행하는 새 시설들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동안 계속 같은 사람들이 살림을 맡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이곳은 놀랍게도 여전히 조용하고 아름답고 평온했다.


한 군데 새로 생긴 듯한 곳을 발견하긴 했다. 섬이정원이라는 이름의 유럽식 개인 정원. 사진을 보고 예뻐서 즉석에서 가보기로 한 곳인데, 마음에 쏙 들었다! 입장료 5천 원이 아깝지 않았다. 좁은 산길을 따라 좀 올라가야 하는데, 일단 도착하니 주차 공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섬이정원은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9개의 작은 정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체 규모는 그렇게 크진 않았다. 천천히 거닐면서 중간중간 놓인 의자들에 앉아서 쉬기도 했는데 다 보기까지 1시간 정도 걸렸으니까. 색색의 화사한 꽃들, 아담한 산책로들, 작은 분수와 연못들,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파빌리온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와 하늘 끝에 선 것 같은 느낌의 작은 호수가 있었다.



어쩌면 남해는 소박한 취향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이 섬엔 과시적이고 화려한 것들이 없다(산길에서 번쩍거리는 조명으로 치장한 모텔들을 보긴 했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신기하게도 이런 몰취미한 곳이 거의 없는 것이 맞다). 섬이정원도 아기자기하고 자연스럽게 꾸며놓은 곳이어서 남해와 잘 어울렸다. 관광지에 있기 마련인 화려한 포토존 같은 것도 없었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본떠 만든 스폿 정도가 오리지널하지 않다 싶었을 뿐(이것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없는 곳이었다. 사실 실제 공간이 사진보다 더 좋다.



- 7.26 추가 : “남해가 소박하다  일부 취소다. T  생일 기념 여행으로 남해에  갈까 하고 검색을 해봤는데 숙박 가격이 너무 오른 것이다.  여행에선 호텔을 하동에 잡았기에  몰랐던 . 4 전보다 거의 2배가 오른  같다. 예전에 우리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도 너무 올라서 깜짝 놀랐고 다른 곳들도 비슷하다.


물론 한여름인데다 전반적으로 물가가 올랐고 가격상승에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2배나 오르는  너무 했잖아? 유럽 물가와 비교해봐도 너무 했다.  빌라 같은 곳은 심지어 40-50만원이었다.


남해가 유명해지고 관광지로 뜨기 시작해서 이런 거라고 생각할  밖에 없다. 한국이 싫어진다. 그래도 소박하게 여행할 곳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기있고 ‘하다 싶으면 가격이 미친듯이 올라가는 현상이 남해에도 침투했구나. 해외여행이 차라리  저렴하고 맘편하다는 말을 이젠 인정할  밖에 없겠다. 동남아는 물론이지만 작년 유럽 갔을 때도 적당한 가격에 예쁘고 깨끗한 숙소들을 찾을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도 한여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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