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레이리스트
음악을 많이 듣다보니 개별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매거진을 하나 만들고 싶어졌다. ’내 인생의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곡들, 항상 좋아하는 곡들, 요즘 새롭게 좋아하게 된 곡들 등등.
돌이켜보면 음악을 진짜 많이 들었던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아무래도 학교에 갇혀있게 되니 자동적으로..? 다른 이유지만 역시 못돌아다니게 된 요즘도 다시 음악을 많이 듣는다. 나는 여행가서는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외부 자극만으로 이미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과 음악이 상호대체적인 아이템이라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확실히 음악은 외부에 자극이 별로 없을 때 듣게 된다. 외면이 빈곤하면 내면을 키우게 된달까.
스트레스가 많을 때도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 중에 가장 치료효과가 뛰어나다. (반면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치료효과를 보기는 쉽지 않다…) 아, 음악 전공자들은 이게 어려울 수도 있겠지. 이럴땐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ㅎㅎ (비슷한 예로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늘 생각한다 : 이 경우는 노동강도가 너무 세서…)
곡들에 대한 새 이야기는 차차 쓰기로 하고, 우선 전에 피아노 연습 매거진에 올렸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요즘 쇼팽을 넘어 브람스, 라벨, 베토벤 등등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듣는다. 특히 베토벤을 많이 듣는다. 얼마 전에 타개한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에서 하나 하나씩 들어본다. 이 앨범을 들어보면 폴리니를 쇼팽 전문가로만 알고있는 것은 아까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쇼팽은 바흐처럼 바흐는 쇼팽처럼 쳐야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다이내믹의 기복이 심하고 리듬이 불규칙한 베토벤 곡들을 폴리니는 지극히 절제된 해석으로 연주하여 뛰어난 균형감각을 들려준다.
옛날에는 베토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장대하고 엄숙해서 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든 덕분인지 몰라도 요즘은 베토벤만큼 음악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그 무한한 깊이를 보여준 작곡가가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들은 전형적인 ‘영웅적 시기’의 곡들이기에 나도 주로 그런 곡들만 알고 있었고 베토벤의 다양한 면모들을 몰랐던 것도 있다. 요즘 새롭게 발견한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은 이런 곡도 있나 하고 놀랄 만큼 ‘전형적인’ 베토벤 스타일이 아니다.
이 후기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아도르노의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도르노가 ‘만년 양식’이라고 부른 이 최후의 소나타들은 뜻밖에 한없이 가볍고 누군가의 표현처럼 ‘허공을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처럼 천진난만한 가벼움이 아니라 전통적인 음악의 구조를 다 해체한 끝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가벼움이다. 역설적인 것은 중력을 초월한 것 같은 이 가벼움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구조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악보를 봐도 인간의 힘으로(?) 연주가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난해하다.
그 절정에 달한 곡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no.32이다. 특이하게도 단 두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소나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2악장이다(물론 하나의 소나타는 하나의 전체이기에 전 악장을 한꺼번에듣는 것이 최적의 감상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매번 그럴 것까진 없으니까). 아리에타(Arietta : 작은 아리아)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 2악장은 몽환적인 선율로 시작해서 현대 재즈를 방불케 하는 리드미컬한 흔들림을 지나 마침내 더 이상 음악이 아니라 음들의 진동 혹은 경련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후반부에 이른다. 음들은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며 아도르노의 표현처럼 ‘고별’을 알린다.
토마스 만은 아도르노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파우스트 박사>에서 이 2악장을 “소나타에 대한 작별”이라고 불렀다(이 소설은 초반의 늘어지는 전개가 지루해서 아직 완독할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이 소나타가 언급되는 부분은 읽었다. 여담이지만 토마스 만은 세련된 주제의식에 비해서 솔직히 글을 잘 쓰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아도르노는 이 곡을 포함해서 베토벤 만년의 곡들을 알레고리라는 미학적 개념으로 분석한다. 문화적 관습(대부분 종교적 관습)에 의해 인정된 기표 - 기의의 관계를 사용하는 상징과 달리, 알레고리는 사용자의 임의적 선택에 의해 기표에 기의를 담는 수사법이다. 이때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통일성을 잃으며,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공허한 '잔해'가 된다. 하지만 이 잔해적 성격이야말로 예술의 존재방식 자체를 반성하는 현대적 감성의 최전선이다. 도달해야 할 완성의 지점에 대한 욕망 없이 소나타 형식을 공허하게 회전시키는 피아노 소나타 32번도, 아름다움은 항상 지나간 것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단순함과 복잡함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꺼번에 들어있는 이 소나타의 특이함은 조성에서도 드러난다. 이 곡의 2 악장은 검은 건반을 칠 필요가 없는 다장조이다. 가장 기본적인 조성인 것이다. 또한 으뜸화음은 으뜸화음으로 곡의 중심을 차지하며, 후반부에 가서는 더 그렇다. 불협화음을 해소하지 않은 채 종지를 지연시킨다던가 음정을 급격하게 확대한다던가 식의, 요컨대 낭만주의 음악이 갔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나오는 효과는 고전주의 음악의 전형과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흔히 이야기하듯이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선구자였던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를 뛰어넘었다고 말한다. 이 곡을 “인류의 불가사의”라고 표현했던 안드라스 쉬프의 말에 너무나 동의한다. 어떻게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틀 안에서 가장 극단적인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을까? 이 곡을 듣고 있으려면 어느 순간 정신이 조금 혼미해지면서 현기증이 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베토벤은 20세기의 많은 락 음악가들이 추구했던 ‘다른 세계를 보는 지각의 문’을 한 세기 앞서 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폴리니도 이 곡만큼은 좀 아닌 것 같아서(각자 해석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내가 볼 때 좀 더 몽환적으로 쳐야 할 것 같은데 폴리니 연주는 너무 또랑또랑? 하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더 찾아봤다. 그러다 이거다! 하고 단박에 마음에 들었던 것이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으면서 공허하고 그런가 하면 또 강한 에너지를 지닌 이 곡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연주다.
https://youtu.be/XW9e28bYbJA?si=W07MvosX4_DZy1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