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이 터
주로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곳.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활동 장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잠시 눈을 감아본다. 어릴 적 그저 놀고 싶어서 갔던 그곳을 그려본다. 난 그림에 소질이 없다. 그렇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치 화가가 된 거 같다.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거 같다. 친구가 뱅뱅이를 계속 돌린다. 어지럽다. "그만 멈춰!"라며 고함을 지른다. 합이 잘 맞는 친구와 시소를 탈 땐 너무 재밌다. 그런데 오늘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난 친구보다 몸무게가 가볍다.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다. 친구는 나를 마음대로 제어하는 게 재밌나 보다. "그만 내려줘!"라며 짜증을 낸다. 더 높은 곳의 세상을 보고 싶다. 욕심이 하늘을 찌르려 한다. "야! 위험해. 더 이상 힘주지 마!"라는 친구의 소리는 귀에 안 들어온다. 계단 오르는 시간에 비해 내려오는 시간이 너무 짧다.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 가성비를 높이자. 서서 타다가 '꽈당'. 내리막을 가로질러 오르려다 '꽈당'. 친구는 "야! 계단으로 올라가."라며 말한다. 친구는 "저 사람 대단하지 않아?"라며 질문한다. "철봉이 재밌나? 난 저거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돼."라며 동문서답한다. 놀이기구를 타다 넘어진다. 멍들고 까졌다. 울음보가 터졌다. 그러나 다음날 또 한다. 어찌 보면 그땐 참 거침없어 보이기마저 한다.
무엇을 하기에 멍들고 까지기가 두려워 망설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놀이터에 입성하기까지의 그 짧은 여정은 또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의 기분은 기다리던 택배 우편물의 언박싱 직전의 기분이랄까. 어느 놀이기구를 탈까? 무얼 하며 놀까? 뭘 해도 기대된다. 드디어 입성. '짜자잔' 우리가 나타났다. 길을 비켜라. 이제 친구들과 뛰놀며 즐거워할 차례다. 어찌 보면 그땐 과정 자체를 즐거워했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이 세상이라는 별난 놀이터
행복이 숨기 좋아하는 곳.
많은 감정들이 함께 놀이를 하는 곳.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숨바꼭질은 그 시절부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다. 불행은 나의 술래이고 나는 행복의 술래이다. 늘 꼭꼭 숨어있던 행복을 찾기 전에 많은 시간 불행이 날 먼저 찾았다. '내가 숨바꼭질 놀이를 이렇게 못했나?'라며 다음 놀이를 시작하지만 또 먼저 잡힌다. '여기는 못 찾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또 먼저 잡힌다.
다행히 지금은 행복을 먼저 찾을 때가 전보다 많아졌다.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행복 찾기가 전보다 수월해졌다. 내게 세상이란 누군 불행하고 누군 행복하고 누군 되고 누군 안되고 하는 별난 세상이었다. 이 별난 세상과 이별하려 하는 난 내 가슴속에 별이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그 별은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별은 이미 태어날 때 난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별이다. 낮에도 별은 떠있다는 진실처럼 누구나 가슴속에 별은 떠있다. 그 빛은 내가 가는 길을 밝혀준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건 세상이라는 놀이터로 가는 과정이다. 이제야 난 예전 그때처럼 과정자체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이곳은 행복이 숨기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난 인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오늘은 미술시간이 있는 날이다. 가방에서 찰흙을 꺼낸다. 이 찰흙 하나면 세상 모든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직육면체, 삼각기둥, 구, 정육면체, 엄마 얼굴, 아빠 얼굴, 친구 얼굴 그리고 별, 달...... 등등. 수학, 인문학, 천문학뿐만 아니다. 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내 조방만 한 손으로 말이다. 그 시작은 나의 생각과 행동이었다. 찰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도 인생을 살고 있다. 프롤로그 글을 쓰는 날이다. 글 하나면 나를 접할 수 있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무수히 많은 나와 이어진 세상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별 볼 일 없던 내가 말이다. 그 시작은 나의 상상력과 변화였다. 자신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린 만들어야지'라고 하면 뭐가 이리도 쉬울까!
'날 바꾸고 변화시켜 봐야지'라고 하면 왜 그토록 잘 안될까?
그 답을 미술시간에서 얻는다. 찰흙은 이전 형태가 보이니까! 난 내 형태가 안 보이니까!
난 나를 더 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놀이기구와 찰흙에서 나를 보고 타인에게서도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보는 실재 세상에서 배울 것은 고갈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의 형태를 더 볼 수 있어야지만 미술시간 때처럼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치가 없다.
생각의 한 끗 차이가 결과의 천지차이를 만든다.
해 질 무렵 날파리떼가 머리 위를 빙빙 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이제 갈 시간이야."라며 말해준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술래가 날 찾았다. 난 술래의 손에 붙잡혀 집에 간다. "조금만 더 놀고 싶은데......"라며 땡강 피지만 술래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날 찾아다니셨다. 난 집에 가서 일품 김칫국을 먹으며 따뜻한 하루를 마감한다. 행복했던 그 시절 개미굴 같던 동네와 놀이터의 구석구석이 그려진다. 그저 놀고 싶어서 갔던 놀이터의 놀이기구들을 떠올리며 난 잠이 든다.
다음날 함께 놀던 그 많은 친구들은 하나둘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나 또한 그 놀이터를 떠났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들의 다음 놀이터를 찾아간다. 그렇게 놀이터와 놀이기구의 형태는 변해간다.
지금 나의 놀이터는 어디인가?
이 순간 내가 타고 있는 놀이기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