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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에는 도움이 필요하다

by 여울

제일 큰 과제인 책을 제외하고 다른 것부터 하나하나씩 미션 완료를 하는 중이다. '방학이 일주일만 더 있었어도 훨씬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주일이 더 있었으면 정리가 일주일 더 미뤄졌을 수도 있다. 나란 사람에게는... 벼락치기와 데드라인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제도 썼지만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또 다른 것은 아이들의 장난감이었다. 커다란 30리터 이상의 장난감 통이 9개. 몰펀과 카프라와 탑 블레이드와 너프건 총알과 각종 피규어와 로봇 등등이 놀다 보면 섞이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거기에 레고가 같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실에 있는 것만 이렇고 보드게임과 베란다에 있는 다른 장난감들은 일단 제쳐두었다.)


나는 레고를 사랑한다. 아니, 사랑했다. 어린 시절, 정말 찢어지게 가난해서 온 가족이 단칸방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아빠가 레고를 사 오신 것이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서는 (주로 아빠가) 완성된 모형을 손도 못 대게 전시를 한참 해 놓으셨다. 며칠을 기다리다가 나는 그냥 다 부숴서 내 맘대로 만들었다. 아빠는 별말씀 안 하셨다. 엄마 말로는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살았던 일용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이라는데 "너네를 얼마나 사랑하면 그렇게 일당을 다 털어서 그 비싼 레고를 사 오셨겠니."라고 하셨다. 같이 고무줄놀이도 해 주고 호박 씨름도 해 주고 이야기도 들려주고 책도 읽어주시던 아빠의 사랑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결혼 후 알았다. (모든 남자가 아빠 같은 줄 알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사실은 아빠가 레고를 갖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슬쩍 생각이 들긴 했다. 그때 자유롭게 이리저리 집과 건물을 만들어 보면서 브로수어에 있던 공항이나 다른 모형들이 참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레고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나이가 되길 바랐다. 어린 시절 레고로 인해 즐거웠던 그 시간을 아이들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레고를 사게 되면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레고는 비쌌다. 저엉말 비쌌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울왕국 성이나 자동차 모형 등을 사기는 했으나 나는 그냥 종합세트가 좋았다. 왜 안내 책자대로 만들어서 고이고이 전시를 해 둔다는 말인가. 내가 만들고 싶은 거 마음대로 만들고 부수고 나서 다시 만드는 창의적인 놀이가 좋아!라고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꽤 있었는지, 어딘가에서 자잘한 레고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품들도 어느 사이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앗????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엔 작은 박스 하나였던 레고가 어느 사이 거대한 세 개의 상자로 자라나 버렸다. 거짓말 안 보태고 100리터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이 레고 조각들은 한 곳에 얌전히 모여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온갖 장난감 상자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서 하나를 찾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핑계는 물론 있다. 막둥이는 진이나 거대한 대형을 만들어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카프라와 몰펀은 군사 기지와 병정들이 되었다. 네모 병사와 세모 병사들이 카프라 기지에서 열과 오를 맞추어 전투 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이사이 다른 블록들이 배치되었다. 거실 바닥 전체를 꽉 채우고 노는 이 놀이는 보통 서너 시간이 소요되는데 세팅을 하는 것도 일이지만 놀고 나서 치울 때가 더 일이었다. 구분을 하는 척 하지만 세세한 나눔은 귀찮으니 대강대강 담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놀 것 같았던 아이는 자랐고 이제는 가지고 노는 종류와 방식과 횟수가 달라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솎아 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난주의 어느 날. 나는 장난감 상자 9개를 모두 엎었다. 아. 그전에 감사하게도 당근에 1년 넘게 올려두었던 수학 관련 교구 몇 가지가 판매되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상자 안은 당연하게 먼지도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찬찬히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리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저절로 '내가 미쳤지.' 소리가 나왔다. 장난감 상자 9개의 위용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이틀을 꼬박해도 안 되게 생겼다. 밤에 잠은 자야 할 것 아닌가. 아이들을 차례로 소환했다. 막둥이에게는 포켓몬 카드와 너프건 총알들을 담게 했다. 큰 아이는 와서 몰펀과 카프라 담는 것을 도와주었다. 둘째는 도미노와 쌓기 나무, 자석 교구 같은 다른 자잘한 블록들을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레고와 로봇과 각종 보드게임에서 빠져나온 것들을 모두 분류했다.


비싸게 구입했던 팽이 장난감들은 그냥 다 버리기로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요새 아무도 이걸 가지고 안 노는 것 같다. 팽이마다 맞는 런처도 달라서 어느 게 어느 짝인지도 모르겠고 거기까지 신경 쓸 힘이 없었다. 정리하는 사이사이 지난번 판매했던 수학 교구에 따라가지 못한 클리코 조각이 몇 개 나오긴 해서 조금 안타까웠지만 워낙 그 자체 조각도 많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정말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일반 쓰레기봉투를 들고 와서 웬만하다 싶으면 그냥 다 담았다. 쓰러질 것 같은데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끼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노 블록은 왜 자꾸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 쓰레기 20리터 봉투가 거의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장난감 상자를 7개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베란다에 있는 옥스퍼드 블록 외 다른 자잘한 장난감들의 부분에 관해서는 일단 마음의 눈을 감기로 하자. 보드게임 부품들은 일단 바구니 하나에 모아 두었다. 보드게임 부품들을 정리해 주는 것은 다음으로 해야 한다. 내 사랑 레고도 반 이상 다 버리고 싶었는데 막둥이가 안 된다고 했다. 막둥이 눈을 피해서 자잘한 조각들은 그냥 몰래몰래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3 박스에서 2 박스로 줄이는 것이 목표였는데 실패해서 2 박스 반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결과라도 나온 것이 어디인가. 하루 날 잡아서 둘이서 뭔가 만들어 보면서 또 비워내리라 결심했다. 남은 박스 하나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돌아다니던 너프건들을 세워 담아주니 보기에 좋았다.


고생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물론 그날은 너무 힘들어 나갈 수 없었고 다음 날 나가서 사 왔다. 아이들이랑 같이 했는데도 마무리 정리와 청소까지 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했다는 것을 하면서 절절히 느꼈다. 청소와 정리는 특성상 엄마가 주도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함께 살아가는 공간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솔직히 성가시다. 그냥 말없이 내가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함께 한다. 함께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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