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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약 봉투를 뜯으며

by 여울

이제 많이 좋아졌다. 어쩔까. 오늘 밤까지만 먹자. 지난주 금요일 진료를 보러 갔었다. 이번에 바꾼 항생제가 잘 맞아서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루 두 번 아침약과 저녁약에만 들어있던 항생제는 하루 세 번으로 바뀌고 밤에 먹는 약까지 별도로 처방이 될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 덕인지 서서히 귀에서 압력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드라마틱하게 뿅! 하고 좋아지는 그런 것이 없이 서서히 변해갔다.


사진으로 보니 부기도 많이 빠지고 안에 고여있는 콧물도 많이 줄어들고 귀 고막 모양도 괜찮았다. 안심한 표정으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설 연휴가 겹치는 관계로 혹시 모르니 약을 사흘 분 대신 닷새 분으로 처방하겠노라고. 그러나 중간에 괜찮아지면 적당한 단계에서 끊어도 된다고 했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약 기운이 떨어질 무렵이 되면 다시 콧물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는데 오늘은 훨씬 나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저녁 약을 먹기로 했다.


이번 약이 독하긴 했는지, 아팠어도 어떻게든 할 것은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다 놓고 있었다. 누워서 웹소설을 두 권을 완독 했고 안 하던 핸드폰 게임까지 했다. 해 보니까 아이들이 왜 현질현질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생명력이 결정적인 순간에서 모자란다. 그러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레벨이 올라갈수록 미션 난이도는 더더욱 높아지니 아이템의 효과 없이는 해결하기 어렵다. 그래도 게임에 돈을 쓸 수는 없지. 꾸역꾸역 생명력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했다. 그러니까 아침과 저녁에 꼭꼭 한 번씩은 한 셈이다. 중간중간 쉬는 텀이 있어도 해 봤고.


설 연휴 시작할 때 마지막 약을 먹게 되어서 참 다행이지 싶다. 애써 치운 집은 다시 엉망으로 어지러워졌다. 아픈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하루에 최소 20분은 운동을 하려고 애를 썼다. 없는 기력을 짜내어 운동을 하고 나면 다시 쓰러져 누워있다가 아이들 점심을 차려준다. 그리고 다시 누워있다가 한두 가지 집안일을 조금 한다. 미뤄 둔 냉장고 청소를 한다거나 책장 정리를 조금 한다던가 아이들 옷장 정리를 한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누워있는다. 집안일의 강도가 약하면 피아노 연습까지 할 수 있고 강도가 세면 그냥 바로 저녁 시간이 된다. 방학인 것을 알고 아이들은 병원에 갈 일을 알아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둘째는 멀쩡히 잘 걸어가다가 홈발레 바를 발로 차서 새끼발가락에 금이 갔다. 밀린 병원들 순례도 사이사이 다 마쳤다. 이 방학 동안 어디를 데리고 못 간 것이 제일 미안하다. 과학관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갔다 오면 나는 다시 아플 것을 알아서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못 갔다.


이번 주는 모든 것이 쉬어간다. 공부도 책 읽기도 심지어 피아노 연습도 강제 종료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1월은 계획의 반도 못했다. 강제로 스탑 버튼이 눌러졌는데 어떻게든 더 하려고 하다가 2주면 끝날 것이 결국 한 달을 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이번 독감이 매우 독해서 후유증이 이렇게 나타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은 애매하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시기가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반갑지 않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운동 잘하고 이 세 가지를 그동안 대충 넘기다가 재작년부터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으면서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책만 읽고 너무 피아노만 치고 너무 일만 했는데, 비율의 정도를 조금씩 옮겨야겠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들어주면서 이제는 약 기운에 그만 취하자고, 오늘로 이제 이 독한 항생제의 영역에서 벗어나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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