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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굳이 안 보이는 곳을 청소한 이유는

by 여울

누구나 그러하듯 새해 목표는 다부졌고 특히나 시작되는 첫 달인 1월의 목표는 야무졌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악장 어느 정도 완성하기, 영어 원서 읽기, 운동 꾸준히 하기와 같은 기본 목표 이외에 출간을 목표로 한 원고 어느 정도 정리하기와 이사 대비하여 집안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기가 그것이었다. 사이사이 반가운 인연들과의 만남은 물론 기획되어 있었다.


이 야심 찬 계획들이 3분의 1 가량만 지켜진 것은 지금까지 4분의 3 가량의 기간을 골골대며 겨우겨우 생존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어젯밤 마지막 약 투입을 끝으로 오늘 나는 다소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아이들 아침도 오랜만에 제대로 챙겨주고 슬쩍 정리를 한 다음 운동을 했다. 30분만 할까 고민하다가 모처럼이니까 하면서 1시간을 꽉 채워서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면서 어제 대강 짜둔 오늘의 계획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듬었다.


우선 냉장실 청소를 마저 한다. 그전에 설거지부터 먼저 끝내고 재활용품 정리도 했다. 지난번에 선반 세 개만 치웠는데 오늘은 서랍 두 개를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첫 번째 서랍까지는 괜찮았는데 두 번째 서랍을 꺼내자 그 밑으로 흘러내린 갈색의 액체가 말라 붙은 흔적과 가루 같은 것들이 있다. 서랍부터 먼저 깨끗하게 닦아서 엎어놓은 다음 냉장고 안쪽도 싹싹 닦아 준다. 문 쪽에 있는 다양한 소스와 양념들 중에서도 정리할 것들을 조금 빼냈다. 서랍에 있던 식재료 중 지금 먹으면 좋을 것들로 간단한 반찬을 만든다. 멸치조림을 했더니 세 통이나 나왔다. 식으라고 뚜껑을 열어 두니 아이들이 오며 가며 조금씩 집어 먹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아이들이 점심은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라면이 떨어진 지 좀 되어서 거의 2주간 라면을 금식했다. 셋째가 대표로 나가서 컵라면을 사 와서 점심은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다. 그 사이 청소기를 간단하게 돌리고 이제 벼르고 벼르던 넷째 장난감 통'들'에 시선을 주었다. 장난감 정리가 책 정리 못지않게 큰 일이라서 정말 많은 용기와 각오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레고. 커다란 박스 두 개에 담겨 있던 레고를 세 개의 조금 작은 박스에 옮겨 담았다. 조카들에게 가져다 주기로 했다. 레고 박스가 들어 있던 자리에 로봇과 동물 피규어 박스가 들어간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나이면 로봇은 좀 정리해도 될 것 같은데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낡아서 떨어진 보드게임 박스들을 수선해 주고 짝을 맞춰서 넣어준다. 너프건들과 총알들을 다 모아서 정리한다. 여전히 곳곳에서 나오는 카프라와 도미노, 몰펀 조각들까지 다 정리해서 넣어주었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만 했어도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마음에서인지 나는 책상 아래 있던 책장을 들어내고 말았다. 옆으로 세 칸이 있는 1단짜리 낮은 소파식 책장이었다. 끙끙거리며 책장을 빼낸 순간,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나는 왜 굳이 여기를 빼냈을까. 먼지는 예상했다. 모르는 사이에 뒤로 넘어가 벽과 책장 사이 껴 있던 존재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먼지 속으로 떨어진 책들과 보드 게임 상자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도 같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사이사이 구출해 낸 연필만 열댓 자루... 어쩐지 연필이 자꾸 없어지더라니. 없어져서 찾았던 퍼즐 조각들도 모두 여기 있었다. 짝이 맞지 않아 이미 다 버렸는데. 그 와중에도 아이가 좋아하는 포켓몬 카드와 할리갈리 카드들을 꺼내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먼지가 어찌나 많은지 물티슈를 열 장은 쓴 것 같다.


손가락이 먼지를 먹어 깨끗하게 씻은 뒤에도 버석버석 거린다. 혹시나 싶어 책장을 앞 뒤로 좌우로 다시 밀자 또 먼지가 나온다. 다시 닦아 낸다. 거기서 나온 조각들을 어느 정도 원래 있을 곳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청소기를 돌렸다. 물걸레질로 마무리하자 모처람 거실 바닥에 빈 공간이 보인다.


우리 집은 남향이다. 정확하게는 저녁노을이 근사하게 보이는 남서향집이다. 그런데 이 거실 창을 짐들이 막고 있었다. ㄷ자와 ㅣ자 모양으로 거실 벽과 창을 막고 있으니 좁은 공간이 아님에도 뭔가 답답했다. ㄷ자를 ㄴ자로 만들어 보면 나을까. 그래서 열심히 빼내고 정리를 한 것이다. 이제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베란다의 짐들을 정리하면 된다. 거실 창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짐들 덕분에 시선이 차단된 공간에는 자잘한 짐들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저곳까지 시야를 넓혀주면 내 마음도 조금 더 넓어질 것 같았다.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서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그리고 그 걸음을 뗄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된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물론 몇 줄 안 되는 이 정리와 청소는 오늘 하루 종일 걸렸다. 하는 도중 어찌나 힘든지 하다 말고 드러누워 바들바들 떨면서 음식 준비에도 바쁜데 왜 굳이 이러고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굳이 안쪽에 있는 책장을 들어내어 먼지를 닦아내면서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았다.


나는 음력일지언정 새해를 그래도 깨끗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맞고 싶은 것이다. 물론 아직도 청소할 곳과 정리할 곳은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작은 내일로 미루는 순간 정말 실천할 수 있는 오늘은 오지 않는다. 몸이 아픈 기간에 조금씩 감질나게 치우면서 더 간절해졌던 마음이 오늘 나왔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 갈비찜을 하면서 글을 쓰고 마무리한다. 연휴 음식 준비까지 알차게 마쳤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음력 마지막 하루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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