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mie Nightingale
실수였다. 처음부터 이 책을 알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원래 읽었어야 하는 책은 Nightingale이 들어가는 다른 원서였다. 올해 읽을 원서가 많아 책의 권수를 조금 줄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아니고 다른 원서 읽기 모임에서 읽을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름의 꼼수를 쓴 것이다. 그런데 선택하고 나서 보니 다른 나이팅게일이었다. 나이팅게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아리송했다. 다른 책들처럼 줄거리가 시원시원하게 쭉쭉 뻗어나가는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보여서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해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인 십 대 소녀 세 명은 답답하고 답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읽혔다. 결국 걸어가면서도 읽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읽게 되어 예상 진도보다 빠르게 책을 완독 했다.
레이미는 치위생사와 함께 집을 떠나가 버린 아빠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자신이 배턴 트월링을 해서 미스 센트럴 플로리다 타이어가 되면 신문에 실린 자신을 보고 아빠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배턴 트월링 레슨은 잘 되지 않는다. 다른 두 명의 소녀가 더 있는데 첫 레슨은 우왕좌왕하다 끝나고 그다음에도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함께 배우는 두 명의 아이 역시 독특하다. 루이지애나는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할머니와 사는데 몹시 가난해서 고양이를 키울 수 없어 동물보호시설로 보냈다. 루이지애나의 목표 역시 미스 플로리다가 되어 상금을 받아 고양이 아치를 다시 데려 오는 것이다. 비벌리는 이미 배턴 트월링을 잘한다. 엄마가 배턴 트월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반항을 보여주려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혼미하다. 우울하다. 루이지애나의 고양이를 데리러 간 동물보호센터는 실제로는 (원래도 그렇듯이) 동물들을 학대하고 죽이는 곳이었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선행을 하기 위해 찾아간 요양시설에서는 엉뚱한 일을 겪게 된다. 그 와중에 정신적 위로를 주던 이웃집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레이미의 삶은 우울과 혼란 그 자체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우리의 삶에 소설처럼 뚜렷한 기승전결이 생활 속에서 확실하게 보이는가? 매일매일 극적인 사건이 숨 가쁘게 이어져서 갑자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해결이 되어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이라는 문장이 나오는가?
물론 소설이니까 여기서도 극적인 사건은 나온다. 루이지애나가 사고로 물에 빠지고 레이미가 구해내는 과정이다. 그 일로 레이미는 신문에 나고 아빠가 정말로 전화를 한다. 하지만 아빠는 그저 전화를 했을 뿐 어떻게 하지 않는다. 곁에 있던 간호사 루디는 아빠를 두고 He is a skunk.라고 말한다. 스컹크는 구린 냄새를 풍기는 기피 동물이다. 사람에게 스컹크라고 하면 상종 못할 놈, 비열한 놈, 싫은 놈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이를 두고 상처를 주며 그렇게 떠나가 버린 아빠는 skunk가 되는 것이다. 아치가 돌아온 기적에 대해서도 "It's just a cat. That's how they do."라고 담담하게 현실을 말해 줄 뿐이다. 그것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현실에 대해서 꾸미거나 과한 위로를 하지 않는다.
Raymie Clarke는 이제 자신을 Raymie Nightingale이라고 부른다. 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건네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밝게 빛나는 길'이라는 책은 미루고 미루면서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제목이, 그 표지의 그림이 자꾸 레이미의 마음에 감돈다. 레이미의 삶은 우울하고 빛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bright and shining이라는 말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이다. 동시에 돌아가신 이웃집 할머니의 질문도 반복해서 나온다. Tell me, why does the world exist? 내게 말해 보렴. 세상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게.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레이미는 찾고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독자 모두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왜 세상은 존재하고 왜 우리는 계속 이 아픈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암흑의 시대에 빛을 주는 길을 걸었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삶이 정말로 오랜만에 내 마음에도 들어왔다.
루이지애나를 구하면서 레이미는 그녀의 영혼이 다시 커지는 것을 느낀다. Raymie's sould was huge inside of her.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지만 또 밖에서 오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배턴 트월링을 잘하는 것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비벌리는 루이지애나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Listen to me. You don't need to learn how to twirl. All you have to do is sing. That will win you any contest. 노래를 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루이지애나는 노래를 해서 상을 받고 그 상금을 받아 비벌리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높은 탑으로 올라간다. 루이지애나는 고소 공포증이 있지만 친구들이 있어 함께 올라간다. 차마 눈도 뜨지 못하는 루이지애나에게 아이들은 아래에 보이는 것들을 묘사해 준다. 그리고 늘 차갑고 냉정했던 비벌리가 말한다.
Open your eyes. And look for yourself. 눈을 뜨고 직접 보라고.
Don't worry. I'm holding on to you.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너를 잡고 있다고.
I've hot you, too. 레이미도 잡아주면서 말한다. 나도 너를 잡고 있어.
그렇게 아이들은 함께 오랫동안 세상 밖을 바라본다. The three of them stood like that for a long time, looking out at the world.
나이를 먹고 세상에서 이렇게 살았어도 여전히 세상 밖을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어찌어찌 살아가기는 하지만 늘 답을 명확하게 알고 방향을 정해서 뚜렷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금이 작가의 '너도 하늘말나리야'가 떠올랐을까. 미르, 소희, 바우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이리저리 가는 과정이 세 명의 소녀들의 아픔에 투영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은 늘 무엇인가의 '부재'가 있을 것이다. 항상 완전하게 충만히 채워진 삶이란 것은 드물 것이다. 부연 안갯속 같은 날도 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뭐가 해결책인지도 몰라서 헤매는 날들 속에서 갑자기 또 괜찮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우리 삶의 방향을 찾아서 나가겠지. 그렇게 잔잔한 위로를 받는다.
이 책은 Three Rancheroes라는 시리즈로 루이지애나와 비벌리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이기도 하다. 그 부분까지 너도 하늘말나리야 시리즈와 비슷하다. 실수였지만 덕분에 의도치 않은 보물 같은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