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 보지 못한 길, 앞으로도 가지 못할 길에 대한 감동적인 조우
프사에 꽃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아마 무심결에 지나치던 자연의 경이로운 장면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어느 순간 내게도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다른 것이라면, 꽃보다는 나무의 잎사귀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부분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색색의 빛을 자랑하는 꽃들보다도 스쳐가는 눈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많고 많은 그 수많은 나뭇잎들. 그 잎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그 푸른 잎들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사로잡힌 것은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게 초록빛이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색이 뭐야?"라는 질문에 늘 파스텔 계열의 하늘색이나 분홍색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지금도 좋아함에는 변함이 없다고 여겨진다. 다만 수채화를 그리며 보니 의외로 초록색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초록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연한 레몬빛부터 시작하여 짙은 남색에 가까운 쨍한 청록색까지 그 수많은 푸르른 초록 계열의 색들은 종이 위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곤 했다. 하지만 그 푸르른 빛에 대한 사랑과 탐색은 수채화 용지 위에서 멈출 뿐이었다.
내게 있어 나무는 좀 가까이하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알레르기 증상이 있었다. 나무에 너무 가까이 있거나 풀밭에 어느 정도 이상 머무르면 몸이 서서히 간지러웠다. 팔부터 시작해서 종아리, 허리, 배, 등까지 서서히 간지러움이 올라와 나중에는 온몸을 벅벅 긁고 싶을 정도로 그 증세를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고 좋다고 칭송하는 봄과 가을은 내게 참으로 혹독한 계절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괜찮지만 한적한 전원에서의 생활이나 숲 속 휴양림에 있는 통나무집 생활은 꿈을 꿀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렇기에 나무와 식물을 평생 연구하는 이 과학자 호프 자런의 삶은 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책이 좋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녀의 실제 삶에 풍덩 빠지지 않아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출간된 지 10년이 된 책, 랩 걸 (Lab Girl)을 나는 이제야 만났다. 결코 얇지 않은 이 책을 읽는 것은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그녀의 삶과 식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밀푀유 패스츄리 같은 책. 식물 이야기를 읽다 보면 또 다른 식물의 이야기가 알고 싶어 졌고 그녀의 다채로운 삶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다음 행보는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사이사이 무심한 듯 정교하게 배치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발견에 눈을 뜨는 것과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나중에는 당연스러울 지경이었다.
몰랐던 나무의 이야기들, 관심조차 없었던 버섯과 이끼 같은 작은 생명체들의 이야기들이 거대한 물결로 나를 덮는 그 감동은 한 번을 읽고 두 번을 읽고 세 번을 읽어도 여전했다. 물론 다양한 식물의 이름들과 학명들은 나를 읽기를 멈추게 하는 덫이 되니 중간중간 적절하게 한글판의 도움도 같이 받는다. 하지만 가끔씩 멈추고 필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들을 만나면 또 원문으로는 어떻게 쓰였는지 너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영어 원서와 한글 번역서를 번갈아 가면서 랩 걸을 열심히 읽었다.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Each beginning is the end of a waiting. We are each given exactly one chance to be. Each of us is both impossible and inevitable. Every replete tree was first a seed that waited.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모든'이라고 번역된 단어들에는 every도 있지만 each가 더 많이 쓰였다. every가 전체를 통괄하는 느낌을 준다면 each는 하나하나 개개인을 챙겨주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그러니까 '우리'라고 하나로 그냥 퉁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포함된 그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챙기는 느낌인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문장은 다른 표현으로 나타났다.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라는 말로 새롭게 보니 그 의미가 또 그윽하다. 시작하고 과정을 거쳐서 끝을 맺는다. 끝에 도달했을 때 아쉬움과 슬픔도 있지만 또한 기대감과 설렘이 있는 것은 이 끝에 도달하기까지 내가 지나온 모든 과정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번역은 모든 우거진 나무라고 되어 있다. 의역이다. 'replete'은 '아주 충만한, 넘치도록 가득 찬, 완전한' 등의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잔뜩 먹었는데 또다시 새로운 음식을 한가득 대접한다. 이미 상이 가득 차려져 있는데 거기에 또다시 채워 놓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replete'은 're+ple+ate'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어딘가 친숙하다. 우리가 잘 아는 'complete'과 비슷하다. 're'는 '다시', 'ple'은 '채우다', 'ate'은 형용사적 형태를 만든다. 'com'은 완전히라는 뜻의 접두사이니 'complete'은 '완성된, 완전한'이라는 형용사가 되기도 하고 '완성시키다, 완료하다'의 동사가 되기도 한다. 'ple'은 '엮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바구니를 엮을 때처럼 한 줄 한 줄 서로를 겹치면서 채워나가며 완성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잠시 저자가 왜 'complete'이 아닌 'replete'을 써서 나무를 표현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다 자란 것만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갓 나온 새싹부터 어린 나무가 되고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내며 점차 자라서 열매와 씨를 생산할 수 있는 어른의 원숙한 나무가 되는 이 모든 과정의 매 순간이 하나하나 다 완성된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상태에 조금 더 자라서 더 채워지니 최종의 의미를 가지는 'complete'보다는 '더 가득 차고 충만하게 채워진'이라는 의미를 가진 'replete'을 쓴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replete tree'는 모두 처음에는 씨앗이었다. 기다림을 간직한.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의미롭고 다채로운지는 그 순간에도 보이지만 지나고 나서 보일 때가 더 많다.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중 '말하는 말과 소년'에서 소년 샤스타가 분개하는 장면이 있다. 힘들게 죽을힘을 다해서 과업을 완료했는데 또 다른 임무가 쉴 틈도 없이 연이어 주어지는 것이다. 인생의 갈래에서 힘겹게 분투하는(struggling) 하는 샤스타를 두고 저자는 서술한다. 한 업무가 끝나면 더 큰 과제가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He had not yet learned that if you do one good deed your reward usually is to be set to do another and harder and better one.) 그러니 하나의 일을 완수하고 완성한 것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이를 발판으로 또 다른 시작을 하기 위함이고 또 다른 성장을 하기 위함이다. 지금 자체로도 충분하고 좋지만 또 한 걸음 성장하고 자라 가는 모습이란 얼마나 멋진 장경(場景)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무턱대고 성장만을 위한 확보와 노력은 제한이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한계점에 도달할 때가 있다.
전체가 하나로 기능을 하는 동물들과 달리 식물은 모듈로 만들어져서 전체는 모든 부분의 합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나무는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값비싸질 때 죽는다. In the end, trees die because being alive has simply become too expensive for them..... 모든 것이 동일한 원자재를 사용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원이 남아도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 자원을 얻기 위해 위로 아래로 뻗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충분히 높이, 충분히 깊게 뻗지 못한 가지와 뿌리는 그 영양분들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자원보다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더 적어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Eventually it will require more nutrients to maintain the branches and roots that do not grow quite far out enough to capture those nutrients.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 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Once it exceeds the limitations of its environment, it loses all.
마지 피어시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And this is why you must trim a tree periodically in order to preserve it. Because - as Marge Piercy first said - both life and love are like butter and do not keep: they both have to be made fresh every day.
그러니 또 성장만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정말로 내실 있는, 지킴을 위한 성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나무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본다. 이런 감상에 젖으려는 찰나, 저자는 또 이야기한다.
이렇게 깊은 의미에서 식물과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식물에게 투영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마침내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Only when we begin to grasp this deep otherness can we be sure we are no longer projecting ourselves onto plants. Finally we can begin to recognize what is actually happening.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Our world is falling apart quietly.
이 부분은 한글판보다 원서를 읽어야 더 간절하게 와닿는다. 무너져 내린다는 것도 의미를 잘 살렸다. 하지만 falling apart라는 것은 단순히 무너져 내리는 것 이상이다. 무너져 내리면서 조각조각 다 분해되어 떨어져 버리는 상태. 얼마나 아프고 아픈 말인가 말이다. 사람들은 식물을 단지 음식, 의약품, 목재로만 본다는데 그 이상임을 우리는 알지만 외면한다. 사람의 시선과 잣대에서 벗어나 좀 더 큰 것으로 봐야 이 세상이 또 유지되고 새로울 수 있음을 또 한 번 생각한다. 실험실(랩, lab)에 사는 소녀 랩 걸은 단순한 작은 실험실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 거대한 세계와 조우하는 장면을 내게로 가져왔다.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고 외국에 나가본 경험과 기간도 많지 않은 나에게 호프 자렌을 통해 만나는 그 장대하고 넓은 세계가 주는 감동은 단순하게 감정의 느낌 그 이상이었다. 작게 들여다보는 미시적 세계와 크게 펼쳐지는 거시적 세계의 압도가 동시에 왔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비록 나는 오늘도 봄철의 꽃가루로 인해서 교실 안에서도 팔을 긁고 있다. 재채기도 나고 눈도 충혈된다. 하지만 조금 더 다르고 살짝 더 넓은 시각으로 저 산자락의 나무들과 그들이 자리 잡은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이 작은, 이 큰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는 유기체인지 새롭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시선으로 이 저녁을 맞이하고 싶은지, 어떤 마음으로 삶의 이 순간을 살아야 할지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도 내 나무를 갖고 싶다고 처음으로 간절하게 생각해 본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You'll have a tree and it'll ha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