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변덕을 끌어안는 여행

Prologue:

by 이넢

어릴 적 매년 여름이면 떠났던 가족 휴가. 부모님은 앞좌석에서 큼지막한 지도를 펴고 (그때는 내비게이션 대신 지도책이 있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나랑 동생은 양쪽 창문에 붙어 나무나 가로등 위 까치집을 세던 차 안의 풍경. 이 흔하다면 흔한 가족 여행의 장면 속에, 우리 가족여행에는 다른 집엔 없는 고유 아이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대작, '아빠표 xxxx 년도 가족 하계 여행 가이드북'


A4 용지로 최소 50~60 페이지 두께, 이 풀컬러의 '책자'는 그 해 가족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는 아버지의 수제 가이드북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공기업을 다니시던 아버지는 표지부터 목차, 첨부자료까지 준비된 완벽한 포맷으로, 여행 개요, 일정, 루트, 준비물, 맛집 정보와 유적지 정보 등 참고자료가 잔뜩 들어간 자료집을 매년 만들어오셨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한여름의 저녁, 아버지가 퇴근길에 가이드북을 들고 와 건네주면, 우리 자매는 선풍기 앞에 배 깔고 누워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내일의 여행을 설레 하곤 했다. 떠나는 차 안 뒷좌석에도, 숙소 방 안에도 이 가이드북이 언제나 따라다녔다. 가족 휴가의 심벌 같은 존재.


이렇게만 얘기하면 저 집 가족여행은 아빠의 지휘 하에 굉장히 계획적으로 착착착 진행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리 준비된 일정표에 뭐 하나라도 어긋나면 아빠가 스트레스를 받고, 다른 가족 구성원은 눈치를 본다거나 하는, 빡빡한 여행의 이미지가 떠오를만하다. 내 머릿속에 그런 기억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버지 자랑 글처럼 되어버리고 있지만) 우리 아빠의 정말 대단한 점은 그 모든 정보를 찾아 계획을 세워두고도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생각보다 오래 바닷속에서 첨벙거렸고, 창 밖에 보이는 예쁜 꽃 때문에 갑자기 차에서 내리고 싶어 하기도 하고, 가이드북에서 본 떡갈비가 먹고 싶다며 아빠가 골라둔 점심 메뉴를 바꿔버리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큰 딸이었다. 그 외에도 어린 두 딸의 차멀미와 잠투정, 이유 모를 생떼와 변덕으로 분명 수없이 계획이 흐트러지고 대비책을 세워가며 삼박 사일을 보내야 했을 텐데, 아버지는 그런 대응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런 상황까지 미리 준비하던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빠의 가이드북 속에는 한 가지의 작은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변덕까지 모두 담은 수십 가지의 큰 계획이 있던 걸까.


성인이 되어 야무지게 일단위 시간 단위로 꼼꼼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여행을 떠나봤지만, 변덕스러운 나에겐 그리 즐겁지 않은 경험임을 깨달으면서 나는 계획 없이 혼자 떠나는 여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갑자기 끊는 비행기 티켓과 낯선 행선지로의 여행은 분명 아버지가 준비하던 "가이드북이 있는, 준비된 휴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내가 나중에 자식과 여행을 떠나도, 그런 노력을 할 수 없을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 홀로의 여행 속에서, 우리 아버지가 준비했던 "변덕스러운 딸내미와의 여행"이 느껴진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모든 상황과 감정의 변화를 직면하면서, 나를 달래 가며 대응해나가는 여행. 작고 치밀한 계획도 없이 혼자 걷지만, 매 순간 나의 변덕을 내가 직접 끌어안자는 큰 계획만은 갖고 있는 여행.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의 여행을 아주 조금 닮은 듯싶다.


제주까지의 편도 티켓을 스마트폰 월렛에 넣고, 돌아 올 기약이 없는 이 여행도 그러려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