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제주도, 갈까 말까

설렘이 없는, 불명확한 여행 준비 시작

by 이넢

새해 초, 그때의 나는 한창 괴로웠던 것 같다. 프리랜서로 독립한 지 5개월. 이전부터 쌓이고 모인 것들이 상당한 무게로 달렸다. 각기 다른 프로젝트의 태스크로 얼룩덜룩한 불렛 저널의 데일리 로그에는, 정신없는 나날로 누락된 많은 감정들 중 살아남은, 솔직한 심경들이 섞여있다.




1월 18일 월요일

-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가


1월 20일 수요일

- 정말 일할 의욕이 안 난다. 휴가가 필요해. 깨작거리는 휴가 말고 진짜 휴가.


1월 29일 금요일

-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는데, 늘어져있는 것으로 풀었다

-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길을 자꾸 잃네.


2월 1일 월요일

- 게으르고 스스로가 답답한 시간들이 반복된다. 늘어지고 미루고, 그 와중에 숨 막혀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러나 도망치지 못하는 시간들의 연속. 이 굴레.

- 3월에 제주도, 갈까 말까


2월 2일 화요일

- 누군가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일상이 필요해


2월 9일 화요일

- 게스트하우스 1인실 3월 15일부터 16박 예약. 더 있고 싶기도 한데..

- 15일 11:55 김포-제주, 대한항공



내 여행의 시작이 늘 그렇듯,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보고서를 쓰다 말고 갑자기 숙소를 예약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떠나야만 했다. 깨작깨작 쉬는 척하며 사실은 자꾸 길을 잃는 나를, 광활한 세상에 풀어줘 버리고 스스로 고삐를 쥘 수 있게 해 주어야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제주가 되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번거롭지 않게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단지 그 이유다. 아마 2년 전쯤 이런 휴가를 누릴 수 있었다면, 우붓의 따뜻함과 푸르름, 부다페스트의 해 질 녘, 아이슬란드의 빙하와 나미비아의 붉은 사막 등에 밀려, 제주는 관심 밖이었을지도. 모두가 섬 가장자리가 닳도록 제주를 오가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며 해외로 떠돌아서 이놈의 섬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숙소도 속초 여행에서 만났던 분에게 한번 듣고 저장해놓은 곳으로, 더 찾아보지도 않고 보름 이상을 예약했다. 육지를 떠나야 쉴 수 있다며, 제주만 한 곳이 없다는 친구들의 말에도, 나는 왜들 그리 제주에 호들갑일까 싶은 청개구리 같은 태도였다.


그렇게 제주가 마음에 들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편도를 끊었다. 편도로 여행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당일이나 1박 2일 정도로 어딘가를 가는 게 아닌 한, 언제나 왕복 티켓을 끊어서 움직였다. 아니, 꼭 실물 티켓이 없더라도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 내가 돌아올 시점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봐야겠다.


생각해보니 내 일상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대학원 학기의 시작과 끝,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 용역 계약의 시작과 끝. 모든 것들이 발을 내딛는 시점에 이미 종료 시점이 정해져 있어서, 손에는 왕복 티켓이 여러 장 쥐어져 있었다. 여정이 완전히 종료되어, 이 티켓을 찢어버릴 수 있을 때까지, 도망치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는 기분으로 지낸다.


그런 삶도 괜찮을 때가 있지만, 그때의 나는 한창 괴로웠던 것 같다. 그저 그 말이 정확하다.


그래서, '정해진 끝'이 없는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고 필요할 때 그 무언가의 끝을 정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걷는 시간. 길을 잃어도 좋고, 주저앉아도 괜찮고, 되돌아가도 상관없는 곳. 그 시간과 그곳의 나는 어떨까, 괴롭지 않아야 할 텐데.




2월 9일, 핸드폰에 제주행 편도 티켓 1장과 숙소 예약 확인 내역 1장씩을 캡처해두고 나는 원래 하고 있던 리서치 파일을 열어 밤새 컨설팅 보고서를 썼다. 행선지에 대한 기대도 준비도, 돌아올 기약도, 휴가와 여행에 대한 설렘도 없이. 그냥 일하다 말고 두통약 하나 먹은 것처럼 그렇게. 여행 준비가 시작되자마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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