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집 앞의 공항버스가 코로나로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출발 직전 알았다. (여행 준비 중인 분들은 한 번씩 미리 확인하시길.) 새벽에 짐 싸느라 충분히 자지 못했어서 버스에서 한숨 자면서 가려고 했는데... 물론 지하철로 가면 늦을 일은 없지만, 캐리어를 끌고 환승한다거나 열차 내의 혼잡함을 견뎌야 하는 미션들이 추가되기 때문에 그리 반갑지 않은 옵션인데 이번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현관을 나서 캐리어를 끌고 빌라 계단을 내려가는 첫 발걸음에 깨달은 것은 생각보다 짐이 너무 무겁다는 것이었다. 주니어 시절 같이 출장 갔던 선임에게 눈칫밥을 먹은 이후, 한동안 '고효율의 컴팩트한 짐'에 집착해 나름 패킹의 신이 되었던 나. 출발 1시간 전이면 충분히 필요한 걸 챙기고, 기내용 캐리어 만으로도 1달 장기출장까지 거뜬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무거운 캐리어를 만든 건지. 감을 잃었나, 장기여행이라고 너무 생각 없이 짐을 쌌나. 으.. 이게 무슨 일이야... 최대 사이즈, 21kg의 캐리어를 들고 겨우 2층을 내려오며 후회가 막심했다. 다 풀어서 다시 싸고 싶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없어, 출발할 수밖에.
상당한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사람들에 치이고, 계단을 욕하며, 앉을자리 없는 9호선 급행을 타고, 꾸역꾸역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내겐 설렘의 장소. 생활의 흔적을 모조리 들어내면서 도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 어딘가로 떠나고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국경이 아닌 국경의 느낌이 가득해서, 떠나지 않더라도, 누구 하나 맞이할 사람이 없어도 그저 공항을 메우는 일정한 온도의 공기만으로도 두근거렸던 날들이 있었는데, 오늘의 공항은 그렇지가 않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 하나 차릴 새 없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까지 와버렸다.
제주공항은 막 도착한 나를 반기듯 청량한 모습이다. 조금 선선한 바람이 불고, 야자수가 푸르고. 그런데도 그다지 마음이 들뜨지 않았던 것은 여기부터 숙소까지 다시 1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제주가 원래 이렇게 넓은 섬이었던가? (원래 넓다. 나만 몰랐을 뿐.) 숙소는 원래 이렇게 멀었던가? (원래 그랬다. 내가 미리 찾아보지 않고 왔을 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 오는 사이에 배차시간이 긴 버스를 한 대 놓쳤고, 한 번에 가는 버스 대신 시내에서 한번 갈아타야 하는 버스를 타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며 숙소로 가는 동안,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생각보다 많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불확실성과 낯섦의 소용돌이 속에서 익숙한 것들이 그리워진다. 편안한 집. 내 컴퓨터, 보고 싶은 사람들, 느긋한 대화, 아이스커피. 일상이 벌써 그립다. 뭣하자고 여행을 왔는지, 이제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차피 편도인데, 그냥 집에 갈까. 아직 여행은 시작도 안 했는데, 만사가 귀찮다. 날도 꾸리꾸리 해졌다.
제주, 좋아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