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를 구하게 되자 생활을 루틴화 해야 했다. 오전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학교에 가기 위해 다양한 루트를 도전해보았고, 덕분에 런던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학원이 끝난 후 근무가 없는 날에는 아침에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들고 시내에 널려있는 공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근무는 주로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스케줄이 잡혔는데, 영국인들이 대부분 그 시간에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거의 고정적으로 근무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 가지고 온 100만 원이라는 돈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사용해 버렸기에 부모님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께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조금씩 저금을 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혈기에 노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축구와 농구를 좋아했던 나는 운동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문제는 어디서 그들을 만날까 하는 것이었다. 해외 어학연수나 유학을 하러 가면 현지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기 마련이다. 한국인 친구보다는 현지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어학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노력하지 않고 그러한 결과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어떻게 하면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 어디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나의 답변은 간단하면서 현실적이다.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운동을 좋아했다. 축구를 하다 크게 다친 경험도 있지만,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운동 자체도 즐겁긴 했지만, 팀 운동을 하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공통 관심사가 사람을 얼마나 수다스럽게 만드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운동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에서 운동할만한 곳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관심이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맥도날드에서 같이 일하던 흑인 친구에게 농구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Do you play basketball?"(너도 농구 할줄 알아?)
"I like it"(좋아는 해.)
"You should be tall."(키가 더 커야 돼.)
그는 작은 나를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키가 아주 작아 농구를 잘하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좋아한다고 했잖아! 농구 할만한 데를 알려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줄게."
그는 한바탕 크게 웃더니 근처에 있는 공원을 알려주며 돌아오는 토요일 정오에 그리로 오라고 했다. 영국의 3월 날씨는 여전히 흐렸지만, 한낮에는 운동하기에 아주 적절했다.
그가 말한대로 토요일 정오에 농구장으로 나갔다. 사실 오후 4시부터 근무해야 하는 스케줄이었지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운동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도착했을 무렵 농구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몇몇 아시아 사람들도 보였고, 백인들과 흑인들도 섞여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흑인 친구는 나에게 몇 명을 소개해 주었고, 곧 사람들을 모으더니 게임을 시작했다. 키가 190cm를 넘었던 그 친구는 농구 코트에서 아주 유명했다. 런던에 온 이후 첫 운동이어서 자신이 없었지만, 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웠다. 다행히도 런던 길거리 농구의 수준은 한국의 것과 비교하면 그리 진지하지도, 수준이 높지도 않았다. 주로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였고, 중간중간 장난 섞인 행동들로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가 계속됐다. 흑인 친구는 열심히 뛰어다니는 나를 보고는 엄지를 치켜들며 '굿 플레이어'라고 칭찬해 주었다.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익히게 되었다. 학원에서는 알려주지 않을 여러 가지 다양한 감탄사의 사용법을 알게 된 것이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동양인 친구가 나에게 와서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그 역시 한국어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진명이었는데, 진명이 덕분에 함께 온 서너 명의 친구와도 친구가 되었다. 그중 한 명은 홍콩 출신의 영국인 데렉이었고, 나머지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친구는 한국인 친구대로 현지의 정보를 공유하고 외로움을 달래기에 좋은 친구가 되었고, 외국인 친구는 외국인 친구대로 영어를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내 영어 실력은 아주 미천했지만 일을 하면서, 그리고 친구들과 운동을 하면서 점점 내 것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나둘 외국인 친구들이 늘어가면서 그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고, 영어는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영어는 언어이다. 어떻게 하면 영어가 늘까? 핵심은 '노출'이다. 어떠한 환경이든 노출이 많아지게 되면 그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노출보다 더 확실하게 영어를 발전시킬 방법은 없다.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수업 시간에 큰 소리로 문장을 따라 읽고 듣기평가를 하고 원어민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두 노출을 늘리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노출이 늘어나면 영어는 늘고 싶지 않아도 늘게 된다. 노출을 늘리는 방법은 노출이 있는 곳에 다가가는 것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운동하는 곳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노출을 늘렸다. 어떠한 취미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노출을 확대하는 좋은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종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학업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됐건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과 지속해서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농구를 하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주기적으로 만났다. 특히 진명이는 나와 고향이 같았고, 심지어 아버지들의 회사 또한 같았다. 옥스퍼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유학 생활 내내 그를 통해서 정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록 한국으로 돌아온 후 대부분의 인연이 끊기긴 했지만, 유학 시절 사귀었던 다양한 친구들과의 교류로 내 경험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7시 정도에 학원으로 출발한다. 런던 4존에 위치한 곳에 살던 나였기 때문에 1존에 위치한 학원까지 가는 길은 다소 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존으로 들어가는 지하철 티켓의 비용은 30% 가까이 비쌌기 때문에 이 금액을 아끼기 위해 2~4존까지만 교통권을 끊고, 1존에서는 버스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버스는 구역(Zone)에 구애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루트를 선택하는 것이 시간상으로는 약 30분 정도 더 걸리지만(기차 한번, 버스 두 번을 타야 했기 때문에), 비용적으로는 확실히 절약을 할 수 있었다. 유학생들뿐 아니라 많은 런더너가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학원수업은 12시경에 마친다. 맥도날드 근무가 없는 날에는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들고 친구들과 주변 공원을 찾아 도란도란 샌드위치를 먹으며 런던 시내를 구경했다. 나처럼 매번 샌드위치를 싸오는 친구가 많지는 않았다. 사실 런던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 먹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 당시 한화로 2,500원 정도면 나쁘지 않은 샌드위치를 하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마저도 사치였기 때문에 그들처럼 호사를 누릴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못했다. 대신 매일 저녁 동네 슈퍼에서 사 놓은 식빵에 햄과 치즈를 한 장씩 올리고 이를 포장해 가방에 넣고 다녔다.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점심을 견디고 나면 저녁은 집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참을 만했다.
맥도날드에서 만난 주용이가 주말 아침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었다. 일요일 아침에 한 시간만 배달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한 시간 일한 대가로 13파운드(약 26,000원)의 대가를 현금으로 즉석에서 받으니, 당시 최저시급이 5.25파운드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나름 괜찮은 조건이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맥도날드에서 일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친구들과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요일 새벽 신문배달이 상당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은 없다.
이렇게 루틴 한 생활을 하게 되자 재정상태도 빠르게 안정화 되어갔다. 한달 방값으로 180파운드를 내고 식비로 100파운드를 내니 숙식으로 280파운드가 들었다. 거기에 한 달 치 교통비가 약 80파운드가량 들어가니 전체 기초 생활비는 360파운드, 한화로 72만 원 수준이었다. 맥도날드에서는 학생들에게 주 20시간 이상 근무를 시키지 않았다. 보통 주말 3일을 하루 7시간씩 근무했는데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주 18시간 정도였다. 당시 최저 시급이 5.25파운드였는데 이를 계산하면 주급은 94.5파운드, 한 달로 계산하면 378파운드가 넘었다. 여기에 신문배달로 매주 13파운드는 현금으로 들어오니 한달 수입이 거뜬히 400파운드를 넘게 되었다. 처음 런던에 올 때는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빠르게 안정화 되고 나니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집주인 형님이 가끔 소개해준 청소 일을 따라가면 하루에 100파운드를 벌어오는 날도 있었다. 물론 이곳에 온 주목적이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학원을 빠지고 가야 하는 청소 일을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간혹 이렇게 한탕(?)하고 나면 든든한 주머니만큼 마음도 든든했다. 두 달 정도가 지날 때쯤에 하숙을 끊고 자취를 시작하니 부식비가 거의 절반 가까이 절약되었다. 대부분 주말 식사는 맥도날드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여기저기서 얻거나 중고로 사 온 주방 집기들로 충분히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해본 요리는 맛을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 먹을만한 요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부모님으로부터 200만 원을 추가로 지원받았지만 결국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그 돈 만큼을 고스란히 모을 수 있었다. 사실 연수가 끝난 후 한달 정도 유럽여행을 하기 위해 모아둔 돈이긴 했다.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유럽 여행은 좌절되면서 계획과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 나는 100만원으로 런던에서의 정착에 성공한 셈이다. 100만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던 나였지만 악착같이 벌고 지질하리만치 아껴서 결국 내 힘으로 이루어 냈다. 경제 관념이 확실해진 것은 덤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불편하고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노력에 비례해 빠르게 안정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도 아주 즐거웠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면 시간은 말 그대로 날아간다. 2월에 시작한 나의 어학연수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매일 색다른 나날이었다. 런던이라는 곳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배경의 사람들이 서로 섞여 살아가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 20년 동안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 짧은 6개월 동안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경험들로 인해서 다소 보수적이었던 나의 고정관념도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된 기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