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와 한동안의 시차 적응을 마치자 아주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을 만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1년을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지만, 돌아오니 현실이었다. 한국은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매일같이 친구들을 만나고 늦게 들어오는 나에게(평소 같았으면 이미 난리가 났겠지만) 이상하리만치 크게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이제야 나를 어른으로 인정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다. 1년 동안의 고생을 짐작으로 아시기에 아무 말씀을 안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나에게는 약 두 달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자 혹독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몸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와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런던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생활은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1년 만에 다시 가족 눈치를 보게 되자 답답함은 곱절이었다. 친구와 함께 자취를 시작했음에도 답답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1년 동안의 공백 때문인지 학교 선후배들과도 그리 가까운 관계를 맺지 못했다. 교내외 포럼과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열심히 학교생활에임했지만, 몇몇 교수님들의 수업을 제외하고는 학교생활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2006 월드컵으로 축제분위기였지만 내 삶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재미있고, 익사이팅한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생활을 병행하면서 돈을 벌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학연수 경험으로 학원강사 자리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주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학원에서 인기가 쌓여 파트타임이긴 했지만 나름 스타강사 대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심각한 문법이나 시험을 위한 수업이 아닌 대화나 읽기 위주의 수업이었기에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했다. 런던에서의 사진과 함께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줄 때면 아이들의 눈은 아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 방학에는 중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특강도 담당했다. 특강 일정 때문에 방학을 만끽하기엔 시간이 부족했지만,수입만큼은 상당히 짭짤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오토바이를 장만했다. 온라인에서 만난 같은 기종의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과 함께 주말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투어를 다녔다. 내가 살던 울산은 부산, 경주, 포항이 모두 멀지 않은 거리로, 오토바이를 타고 투어를 다니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였다. 런던에서의 답답했던 뚜벅이 생활의 한을 풀듯, 거의 매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국에도 가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울산 정자해변에서 경주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마음마저 맑아지는 기분이었고 한밤에 찾아간 간절곶 해변은 차분한 운치에 시원한 바람이 더해져 답답한 가슴을 탁 트이게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언양 작천정은 비단 벚꽃시즌뿐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지친 마음을 달래줄 준비가 되어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제는 쉽게 갈 수 없는 내 마음속 힐링 포인트들이 가끔 그리워지곤 한다.
젊은 나이, 적절한 주머니 사정, 여유로운 시간. 삼박자가 잘 들어맞아 내 인생에서 다시 경험해보지 못할 자유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팔자 좋다.'라고 말할 만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내 인생 중에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늘 무언가 답답했다. 허한 마음은 항상 무언가 더 자극적인 것만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내 마음에 안정을 줄 그 무언가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아마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다시 마주하게 된 대한민국 사회의 불편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런던에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떠올린 적이 없었고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 그리 크게 걱정한 적도 없었다.
런던에서 마음이 편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재에 집중하느라 과거나 미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과거나 미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할지 모른다. 명확하게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은 무언가 답답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며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미국은 지루한 천국이라고 한다. 답답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무엇을 하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이때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여유롭고 자유로운 모습이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불안함과 답답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