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에 활동지원사와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티브이를 틀어놓고 주말연속극을 보곤 하는데, 몇 주 전에 종영된 주말 연속극 때문에 화가 난 적이 있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바로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비평글을 구구절절하게 쓰고 싶었지만, 귀차니즘이 심해진 뒤로 주말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서 화는 혼자 욕하는 것으로 끝낸 적이 있다.
그런데, 종영된 드라마 후에 후속작으로 시작된 드라마도 화가 나게 한다. 지상파 방송도 예전보다 의식화되어가며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은 줄어드는 추세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는 예외인 것 같다.
문제의 드라마는 종영 전에 몇 회를 앞두고 갑자기 여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됐다. 이후 여주인공은 세상에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나왔다. 그래, 사람마다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 그냥 넘겼다. 하지만 지고지순한 남주인공의 극진한 보살핌과 강도 높은 재활 훈련으로 하반신 마비된 여주인공이 '장애 극복'해서 다시 비장애인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그 드라마의 엔딩이었다. 현실에선 기적에 가까운 일이 빡센 재활 훈련으로 다시 비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방송으로 나온다는 게 화가 났다. 그것이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지 작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사고 수위에 따라, 마비된 신경에 따라서 재활 훈련으로 호전된 사례도 많이 있겠지만, 드라마 속 사고는 현장에서 즉사할 수 있을 만큼 큰 사고였음을 보여주었는데, (그 정도 사고면 하반신 마비가 아니라 경추 골절로 전신마비 판정을 받아야......) 회복될 수 없음을 암시해 놓고 남주인공의 돌봄으로 재활 치료를 받아서 다시 비장애인 몸으로 되돌아가는 설정은 마치 장애는 그저 여주인공의 불행의 끝장판 요소로서의 장치로만 작동되면서 막판에 해피엔딩으로 장애를 제거하고 극단적인 행복한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을지 작가에 묻고 싶다. 그 드라마를 보고 있던 많은 장애를 가진 이들이 자신은 재활 훈련을 조금 더 열심히 못 해서 휠체어 타는 신세가 된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작가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아무리 허구로 짜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은 허구가 아니라 장애 편견을 조장하는 메시지이다. 허구라면 상상력을 왜 다른 방향으로 펼치지 못하는 것인가? 사실 오래전부터 영화, 드라마 등의 글을 쓰는 이들이 필수과목으로 소수자 인권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자신들이 쓴 글이 많은 대중들의 인식이 되고, 생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다. 그 엄청난 무게를 의식한다면 함부로 글을 못 쓸 거 같다.
이번에 후속작으로 시작된 드라마도 황당한 내용이다. 이 드라마에선 시각 장애를 가진 여성이 나온다. 시력을 좀점 잃어가는 중인공인데 병원 주치의는 신약이 나왔다며 8억만 있으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한다.(지금도 여주인공은 눈은 뜨고 있다:)ㅎㅎ)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엄마는 동분서주하며 8억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 반영되고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며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도 내가 어릴 적에 장애를 낫기 위해서 돈과 시간을 쏟으며 기대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갑자기 더 악화되면서 모든 기대가 무너져 나의 삶도 포기하셨다. 장애는 한 개인의 장애 극복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인데 장애가 낫지 않으면 그다음 삶도 없다는 식의 생각은 몇 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아서 화가 난다.
사실 요즘 우울하다.
나아졌던 허리가 다시 악화되면서 활동지원사들이 힘들어한다. 짜증 섞인 말도 들어야 한다. 나도 내 몸을 어쩌지 못하겠다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앞에 비판했던 글과 달리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장애극복'을 하고 싶어 진다. 왜 나는 활동지원사가 일으킬 때, 한 번에 벌떡벌떡 못 서는 것인가.... 침대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변기로 옮겨 앉을 때마다 활동지원사가 일으켜 세울 때 같이 다리에 힘을 주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허리 통증이 있을 후부터 그게 잘 안 되고 있다. 그러면서 의료서비스에 집착하게 되었다. 고가의 한방병원도 다니고 있지만, 호전이 있다 없다 해서 마음이 힘들다. 활동지원사도 몸에 무리가 오는 거 같다. 결단이 필요했다.
신체적 극복은 더 이상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라도 보조기기를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고 알아봤다. 다행히 대여가 가능한 곳을 찾아냈다.
보조기기를 대여하고도 며칠은 힘들었다. 대여해 온 기기가 내 신체적 조건과 상황에 맞게 제작된 것이 아니라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 기기 사용도 쉽지 않은 듯해서 또 우울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지 않은가.....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방법을 터득하여 조금은 수월해졌다. 물론 외출해서도 문제지만, 우선 집 바깥에 나갈 수 있게 된 것 자체로 지금은 만족하기로 했다.
'장애극복'을 종용하는 드라마와 장애극복을 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나락을 추락해 가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견뎠던지 또 다른 방법이 생겼다. 앞에 썼던 것처럼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나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지 않고 다양한 지원 시스템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