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 하지 마!
영상 전문 번역 9년 차. 회사원 친구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만날 때마다 부럽다는 소리를 한다. 대한민국에서 프리랜서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부류가 아니었던가? 오늘은 뭇사람이 모를 프리랜서 생활의 어려움을 속 시원히 적어본다. 유명인만큼 잘 버는 상위 1% 프리랜서 말고 평범하고 흔한 이웃집 프리랜서 이야기.
프리랜서가 되면 어디 가서 인정받기가 어렵다. 사회생활 해보려고 신용카드를 만들거나 대출 좀 크게 받을 때 여간 신용도가 좋지 않은 이상 프리랜서의 연봉은 통상 40% 정도만 인정받는다. 직장인처럼 4,500만 원을 벌어도 은행에서 인정하는 내 수입은 1,800만 원. 대출 나오면 다행. 신용카드 나오면 다행.
프리랜서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대중도 마찬가지다. 꽤 오래전인데 그때도 번역 일을 하고 있었고 직업을 밝힐 일이 있어서 그저 프리랜서라고 했더니 이메일로 돌아온 상대의 반응. "아^^; 그러시구나. 네, 프리랜서라고 해드릴게요ㅎㅎ" 왠지 모르게 무시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 지인들을 살펴볼까. 주변에 내 직업인 영상 번역가라는 단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확실하게 기억하는 친구는 단 두 명뿐이다. 어느 지인은 아직도 이 일을 정식 직업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지 "그 번역 일 아직도 해?"라고 묻기도 한다. 번역 일이면 번역 일이지 '그 번역 일'은 뭘까.
자꾸만 "넌 너무 아까워"라며 영어 교육 쪽으로 직종을 변경하라고 1년에 한 번씩 타이르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친한 번역가는 참 허탈하게도 친구에게서 "너 네일아트 배워보면 어때?"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너무나 멀쩡히 일 잘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다른 일을 권하다니. 자존심에도 금이 가고 마음이 쓰리기도 하는 사례다.
사람의 3대 욕구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면 이 셋을 바짝 뒤따르는 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라 믿는다. 누군가는 그러더라. 집에서 한량처럼 일해도 돈만 많이 벌면 주위에서 다 인정해준다고. 돈 못 벌어서 인정 못 받는 거라고. 이 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에서 남들 생각 100% 무시하고 살 수 있다면 프리랜서 해도 오케이!
위와 비슷한 사례다. 특히 번역가는 집에서 컴퓨터로 일하다 보니 숙명처럼 겪는 일인데 정말 일하는 걸로 봐주지 않을 때가 많다.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열어 말을 건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거나 잡일을 부탁하는 것. 특히 기혼 여성 번역가는 독박 육아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이 경제 활동을 하는데 집에 있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떠맡고 상대방은 나를 일하는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드라이클리닝 좀 부탁해"
"택배 좀 부쳐줘"
"도시락 좀"
"아버지 병원 좀 같이 다녀와 줘."
회사에 있는 사람한테 이런 부탁 안 할 거잖아. 회사에 있는 사람한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말 시키고 안 할 거잖아? 이런 일을 호소하는 프리랜서가 한 트럭이다. 그래서 결국 공유 오피스에 가거나 개인 작업실을 구한다. 집에서 일한다고 해서 프리랜서의 일이 직장인의 일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데.
프리랜서 되고 살 안 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일단 엉덩이로 일하는 직업답게 한 번 앉으면 일어나지 못하고 과로해야 직장인만큼 벌 수 있는 업종이 많아서 운동 시간이 줄어든다. 특히 프리랜서 초반에는 시간 관리 실패로 자기 관리가 더 힘들기 때문에 낮밤이 바뀌는 사람도 많다. 지금도 영상 번역가가 모여 있는 메신저에 들어가면 새벽 2시에도 절반 이상이 온라인이다. 손목이 삐걱대고 어깨에 돌덩이가 얹히고 두통이 생겨봐야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제야 요가, 필라테스, 헬스장에 다니며 관리하기 시작한다.
매일 출근할 회사가 없기 때문에 실내복과 외출복의 경계가 없어지고 미용실에 언제 갔는지 기억도 안 나니 자기 관리가 사라지는 마법! 어쨌든 생애 최초로 뒤룩뒤룩 살찌고 못생긴 나를 마주한다. 자존감 안 내려가면 다행이다.
"넌 그래도 직장 내 스트레스는 없잖아."
왜 없다고 생각할까? 그대는 상사 몇 명만 상대하면 되지만 내가 거래하는 회사는 최소 네 곳이고 그 회사마다 겪어야 하는 사장이 있고 그 아랫사람들이 있는데.
영상 번역 프리랜서가 가장 많이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번역 회사의 PM(프로젝트 매니저)이다. 어느 회사는 PM 수가 많아서 지금 휴대폰에 저장된 그 회사 PM만 10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과 매번 인사 주고받고 소개하고 설명하고 어느 때는 인맥 관리까지 해야 한다.
동료 번역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프리랜서 생활 중에는 내 능력치보다 중요한 게 정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소식통들이 있는데 이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업계 트렌드를 놓치고 도태된다. 더 쉽고 요율 높은 일을 얻지 못하니 수입에 지장이 생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 중 좋은 사람만 있으려고? 드라마 공동 번역 때 같이 일했던 한 번역가를 떠올리면 지금도 이가 바득바득 갈릴 정도로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니 프리랜서도 똑같이 인간관계가 어렵다.
프리랜서가 되고 지겹게 들은 소리 중 하나. "평일에 놀 수 있어서 좋겠다!"
좋긴 뭐가 좋아. 평일에 놀면 그만큼 돈을 못 벌어, 이 사람아. 당신은 유급 휴가지! 우린 무급 휴가야! 프리랜서도 직장인만큼 일해야 혹은 더 일해야 직장인 시절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다. 혹 주변 프리랜서가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하며 자랑한다면 부러워할 게 없다. 일주일 여행이라면 일주일 치 수입과 맞바꾼 여행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월차나 연차를 쓰고 유급 휴가를 떠날 수 있지만 그런 건 프리랜서에게 없는 개념이고 우리는 일하는 만큼만 번다. 그래서 다수가 파이프라인 늘리기에 혈안이다. 일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인스타그램에 유튜브에 수익형 블로그에 주말 알바까지 하며 돈 벌기에 나서는 프리랜서가 많은 이유다.
내 주위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프리랜서들은 일어나서 잘 때까지 컴퓨터 앞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나는 프리랜서가 되고 5년 넘게 주 7일 일했고 주 6일 근무를 시작한 게 2년도 채 되지 않는다.
긴 말이 필요할까. 결혼식, 돌잔치, 각종 경조사에 부를 사람이 없어진다. 비혼이어도 상관없다. 만날 사람도 없고 당신 장례식에 올 사람도 없다. 인싸 프리랜서, "프리랜서 인플루언서"가 되어야만 달라질 일이다. 더 말할 가치도 못 느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E가 I가 됐고 사람이 바보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프리랜서는 한량처럼 카페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줄 알지만 다수의 프리랜서가 야근과 과로에 시달린다. 언제까지 일해야 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20분 분량만 번역하고 내일은 40분 분량 번역해야지!’라고 생각해도 내일 해야 할 40분 내용이 어려울까 봐, 혹은 새로운 일감이 들어오면 OK 해야 하니까 주야장천 과로한다. 영상 번역 1년 차 어느 날 친구와 만난 날이 떠오른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난 글썽이며 말했다.
“나... 시간이 없어...”
가족과 얼굴 마주하며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내게 반드시 필요한 나만의 시간은 절대 낼 수도 없었다.
물 들어올 때 심히 노 저어야 하는 직업. 이게 현실이 되면 부담이 심하다.
"개인 시간이 없다"라고 하소연하는 직장인들이 운동도 더 잘하고 자기 관리도 훨씬 더 잘한다. 6시에 퇴근하면 일이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자기 스스로 마침 점을 찍지 않는 한 일이 끝나지 않는다. 이게 최악의 단점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상반기, 당시 해외 업체와 일하던 나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영국 회사 매니저는 코로나에 걸렸다며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고 많은 일감을 주던 홍콩 회사는 무기한으로 영업을 중지했다는 소식만 보내왔다. 또 미국에서 많은 일을 수주받던 국내 거래처 역시 현지 업체가 비상 단축 근무에 들어갔다고 언제 다시 일을 줄지 모른다고만 말했다.
어찌나 눈앞이 캄캄하던지. 집에 있으면 너무 답답해서 매일 나가 1시간 30분씩 걸었다. 대낮에 커피 들고 걸으면서 눈물 흘리던 날들이다. 역병이 아니라도 이런 불투명한 날이 다시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코로나는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도곡동에 있다. 실거래가 38억에 달하는 아파트에서 시터 손을 붙잡고 다니는 아이들과 타워팰리스 주민들을 보면 늘 생경한 동네다. 이 병원에서는 초진에 직업을 알려야 하는데 번역가라는 직업을 보고는 정확히 어떤 번역을 하냐기에 내 일을 살짝 설명했더니 "와, 그럼 수입이 어마어마하시겠네"라고 하신다. 선생님은 제 월급 하루에 버실 것 같은데요...
이렇게 번역 업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외국어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은 응당 수입이 좋으리라 예상한다. 장기 해외여행을 몇 번 다녀왔더니 친구들 역시 내 수입이 짭짤할 거라 믿는 눈치다. 외치고 싶다. 얘들아! 내 여행은 너희가 일시불로 사는 300만 원짜리 가방을 안 사서 갈 수 있는 여행이야! 너희가 하룻밤에 쓰는 40만 원 숙박비가 나한테는 한 달 숙박비야! 난 100만 원짜리 코트가 없어! 그래서 여행 가는 거야!
번역 업계에는 유명한 인물도 손에 꼽고 그런 소수가 아닌 이상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연봉 1억을 넘기 어렵다. 다른 회사들은 승진만 잘해도 1억씩 벌고 사는데 출판 번역의 경우는 20년 차인 분이 한 달에 버는 돈이 170만 원이 안 된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다. 부유한 아내 덕에 번역 일을 유지하신다고.
반면 강남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한다는 친구 동생은 메이크업을 해주며 한 달에 몇천 단위를 번다. 타 업계 프리랜서는 600, 700만 원 버는 사람도 흔하다. 영상 번역 업계요? 말을 말아야지.
2021년 기준 전국 프리랜서의 평균 월수입은 183만 원이다. 이는 정규직의 54% 수준에 불과한 금액이고 프리랜서 열 명 중 네 명의 연 수입이 2천만 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게 공식 통계다. 제발 유튜버 말, 친구의 친구 말 좀 믿지 말자.
요즘은 어디에서 이상한 영상 보고 와서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 되겠다는 사람이 많다.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이네, 3천만 원이네 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괴상한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대개 인플루언서나 유튜버지 일반 프리랜서가 아니다.
집에 가장이 따로 있다면 프리랜서 해도 된다. 그런데 내 입에 내가 풀칠해야 하고, 혼자 건사해야 하는 가족까지 있는 경우라면 내가 위에 나열한 일들이 본인 일상 되는 것이다.
'난 비혼주의자고 최저임금만 받고 살아도 괜찮은데?'라고 한다면 좋아, 그래. 근데 지금은 어리니까 최저 임금만 받고 살아도 좋겠지. 나중에 나이 들어서 큰돈 필요할 때 어떻게 할 건데... 내 길지 않은 인생 중 가장 큰 착각이 내가 영원히 어리고 주목받으며 시간이 천천히 가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프리랜서를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방송계에 발을 비벼보는 것, 시간에 구속당하지 않는 것, 강아지와 붙어 있을 수 있는 것 정도다. 이 삶이 가능하려면 첫째도 둘째도 돈 욕심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돈 욕심 있다? 아직도 디지털 노마드, 프리랜서가 하고 싶다?
1) 당신은 곧 주식에 빠집니다.
2) 당신은 곧 부동산 매매 유튜브만 보며 삽니다.
3) 당신은 쉬는 날마다 임장을 다닙니다.
이렇게 안 하면 돈 못 벌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일하면 단기간에 성공해 엄청난 돈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분들의 세계에 낄 수조차 없고 이 이야기는 온전히 내 쪽의 이야기니까 믿고 싶은 것만 믿으시라. 그런데 프리랜서 생활이란 생각처럼 쉽고 달콤하지 않다는 걸 꼭 염두에 두길.
번역가? 디자이너? 강사? 트레이너? 연극인?
그 직종을 공부하기 전에 대한민국 평균 프리랜서의 삶이 어떤지 그 현실부터 파악하기를 간곡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