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선배가 퇴사하는 기념으로 쓰는) 진정한 리더에 대하여
오늘 존경하는 선배이자 나의 상사인 팀장님이 점심도 거하게 사주고 커피까지 사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2주 뒤까지만 근무하고 퇴사한다고. 청천벽력이었다. 당장 진행되어야 할 공익 프로젝트의 방향을 누가 잡는단 말인가. 내 직속 상사인 대리님이? 글쎄, 나보다 방향을 더 못 잡을 듯한 그 대리님이 부디 방향치가 아니길 바란다.
일단 팀장님의 퇴사 소식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X 됐다.'였다. 그다음엔 '이직을 하루빨리 해야겠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작업을 벼락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엔 '그래도 나보다 먼저 퇴사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이렇게 엿을 주는 건가.'라는 원망도 들었다. 오늘은 존경하는 선배가 드디어 脫대행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내가 보고 느낀 진정한 리더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나는 광고대행사에서 만 4년 차를 갓 넘은 AE다. 사원 때까지는 존경할 만한 롤모델이나 직장 선배 따위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럴만한 그릇을 갖고 있던 상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선임이나 팀장들은 일을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샘플도 던져주지도 않고 무작정 일을 해오라고 지시하거나 텃세 부리거나, 내부 보안상 공유해줄 수 없다는 비효율적인 사람들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원 시절에 팀장 차원에서, 그리고 회사 차원에서 막아줬어야 할 광고주의 컴플레인 때문에 시말서를 썼었다.
그 이후, 퇴사를 결심했었지만 그때 지금의 팀장님과 한 팀이 되었다. 솔직히 그때는 이렇게 나가리인 직원들을 붙여 놓고 알아서 나가라는 건가 싶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팀장님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2명으로 시작한 팀이 4명으로 늘어나기까지 시행착오도 겪으며 단단해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팀장님의 혼을 불어넣은 숭고한 노력이 있었다. 이미 실수투성이로 낙인찍힌 직원을 승진시키기까지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그의 원동력은 뭘까. 난 그것이 바로 선함이라고 생각한다.
팀이 되고 1년 간은 팀장님도 힘들었고, 나도 힘들었다. 나는 기본 중의 기본인 메일 쓰는 방법부터 일정 관리까지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진 직원이었음에도 사람이 완전히 바뀌려면 1년은 걸리는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승진시켜 놓고 보니 또 다른 난관이 왔다.
팀원이 충원된다는 기쁜 소식이 있었으나, 그 직원 역시 낙인찍힌 직원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적 팀장님은 상당히 열받았었나 보다. 상부에 "왜 계속 저에게만 이런 챌린지를 주시냐"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꽤나 막막해하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한 책임감으로 충원된 직원 또한 승진시켰다. 이렇게 팀 운영을 탁월하게 잘하는 팀장님 또한 승진되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회사 측에선 아주 멍청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 이런 비합리적인 태도 때문에 팀장님이 퇴사를 결심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프레임에 갇혀버린 직원들을 그것도 두 명씩이나 승진시킨 것에 대해 회사 입장에선 절을 하며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는 임원을 대신해 잠재력 있는 직원을 두 명이나 성장시켰으니 말이다. 지금 이 회사의 대표는 뇌가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독 팀장님에게 대우를 안 해주는 것도 있다. 그동안 팀장님이 상부에 직언을 너무 많이 한 업보일까.
팀장님은 팀원이 늘어나면서 업무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었지만, 자기 계발 측면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게끔 세미나, 강연회, 독서토론회 등등 많은 것들을 주도하셨다. 그렇게 3년 넘게 달려온 그가 어느 순간 번아웃이 오더니, 마침내 오늘에서야 팀원들에게 퇴사 예정이라고 공표한 것이다. 사실 나도 이해하고 동감한다. 그동안 그는 정말로 혼을 갈아 넣었기 때문에 이제 좀 쉬어야 할 시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에도 원망감이 드는 건 내가 꽤 많이 팀장님을 존경하나 보다.
그리하여 진정한 리더란 어떤 사람인가. 팀장님을 빗대어 본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쓴소리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장점만 계속 부각시킬 줄 아는 선함
단점을 고치라고 조언하기보다는 단점마저 장점화시키는 리더십
여러 방면으로 살펴보고 판단하는 개방적인 태도
팀원의 공을 상부에 어필할 줄 아는 양심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확히 디렉션할 수 있는 혜안
팀원이 리드하는 대로 따라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깊은 인내심
화가 나도 상대방을 배려해 회의실에서 이야기하자고 말할 수 있는 침착함
앞으로 내가 계속 위로 올라갔을 때, 십계명처럼 팀장님의 모습과 나의 사원 시절을 되새기려 한다.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과연 좋은 상사가 될 수 있을지 늘 의문이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00 주임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 이미 너무 잘하고 있고, 이젠 나보다 잘해."라는 말을 들으니 자신감이 조금은 생겼다.
팀장님에게 선한 영향력을 배웠고, 이제 나도 씨앗을 뿌릴 차례인 것 같다. 정말 인연이라면 다시 일하게 될 일이 오지 않을까? 만약 팀장님과 다시 일할 기회가 온다면, 당당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제가 퇴사한다니까 후임이 울더라고요. 이 정도면 많이 컸죠?"라고.
이 글을 팀장님이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보시겠죠?
우선 이 회사가 조금이라도 바뀌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곧 이직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늘 심플하게 가는 제 스타일 아시죠? 얼굴 보고 말씀은 못 드리겠고요.
손 편지로 전하겠지만 그동안 정말 애쓰셨어요, 팀장님. 제가 많이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