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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Oct 26. 2023

요즘 어머니와 사이가 어떠십니까?

독립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고 느낀 엄마에 대하여


"너랑 나랑은 영원한 평행선일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이 이벤트를 신청해 운이 좋게도 독립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게 될 기회를 얻었다. 동창은 고맙게도 내가 영화광인 걸 기억하고, 1인 2매 티켓이니 기꺼이 나에게 보러 가자고 제안해 주었다. 어제저녁 7시 반 경에 용산 CGV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개봉 기념으로 GV까지 알차게 듣고 왔다. 오늘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나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평소 엄마와 나는 그렇게 잘 맞는 타입은 아니다. MBTI로 따지면, 엄마는 ESFJ이고, 나는 ESTP이다. 극강의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나와 반대로, 엄마는 극강의 감성적인 사고를 지녔다. 어쩌면 엄마도 환갑인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감성과 이성을 적절히 사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는 엄마는 늘 감성적이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일을 쉽게 그만두는 사람이다. 물론, 엄마는 30년 넘는 경력을 지닌 배테랑이기에 쉽게 그만둘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죽을 때까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평행선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요새 들어 엄마를 자주 못 보기도 하고, 엄마가 몇 주씩 출장을 자주 가는 터라, 혼자서 집을 지키는 일이 허다하여 더 애틋해지는 부분도 있다. 얼굴을 자주 못 보는 탓에 작년 말부터 엄마와 급격히 사이가 좋아졌다. 이런 현상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작년까지 브런치로 엄마에게 원망하고 분노하며 써 내려간 그 글들은 사실 내 감정이 많이 들어가 있기에, 엄마의 실제 모습과 많이 다르다. 과연 양반가의 여식답게 엄마 역시 올곧고, 선비 같고, 책임감이 막중한 장녀이다. 전 세계의 딸들에게 엄마는 무슨 존재일까?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애증'이지 않을까.




엄마와 나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물론, 내가 엄마에게 반항한다는 이유로 외박을 자주 하고, 외박할 때마다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백번 내 잘못이 크다. 그 이유를 변명해 보자면, 나는 학창 시절에 겪었던 울분과 억울함을 엄마에게 토해내는 걸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지속했다. 엄마와 나는 핏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닮은 부분이 있는데, '욱하는 성질'이다. 사고하는 방향은 다르지만, 생김새와 분위기, 그리고 성질마저 닮은 우리 모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듯 매우 좋다.


엄마는 늘 내 응석을 받아주는 자비로운 엄마인 동시에 엄격한 엄마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내 할 일만 잘하고, 돈도 잘 모아서 시집가기만 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자주 말한다. 나는 엄마에게 영원한 막내딸이니 당연한 말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 백과사전을 끼고 살았던 나는 온갖 교내 글쓰기, 독후감, 경기도 논술문 대회 등등 글과 관련된 상장을 휩쓸고 다녀, 엄마는 재능이 많은 막내딸이라고 자랑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일까? 학창 시절엔 혼자 나를 키우는 엄마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기 싫어서, 그리고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애인데, 어른인 척을 하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가 알바를 쉼 없이 하는데도, 늘 생활비가 부족했고, 엄마 역시 나와 관련된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서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사실 혼인 늙은 남자와 같이 살 때, 나 역시도 억지로 같이 살았다.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이 막혔다. 항상 싸우는 두 중년 남녀를 보며, 한심해했고 갑갑했다. 나는 남자 없이 못 사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고, 외할아버지 댁에 그렇게 이사를 가자고 해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죽어도 싫다며, 절대 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22살 때 공황장애가 왔고, 지금까지 큰 사건을 겪으면 숨이 쉬어지질 않아 울면서 숨을 헐떡이기도 한다.


내가 27살인 무렵, 그러니까 2019년에 드디어 그 늙은 남자와 엄마는 헤어졌다. 내가 직장에 다니니 청년 전세 대출을 받아 내 고향 근처로 다시 이사 오게 되었다. 엄마도 야무지게 단 돈 몇 천만 원이지만 위자료를 받아냈고, 그 돈을 보태어 지금 집을 얻게 됐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 엄마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진작에 서울로 올 수 있었는데, 엄마 혼자 살 수 있었는데 나까지 정신적 고통을 입게 한 엄마가 너무나도 미웠다.




이사 온 지 한 달 무렵이나 됐을까. 출근 전에 아침을 먹으며, 엄마가 갑자기 헤어진 늙은 남자가 무릎에 물이 찼다면서, 이 집에서 살게 하면 안 되냐고 나한테 물어봤다. 나는 그날 온전한 정신이었고, 그 말을 아침부터 꺼낸 엄마가 증오스러웠다. 그 아침에 격노하면서 "엄마, 그 새끼 이 집에 부르면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주거 침입죄로. 그리고 이 집 내 명의로 된 내 집이야.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엄마가 나가 살아."라고 엄마에게 대못을 박았다.


그 이후로, 엄마는 그 늙은 남자 집에 자주 왕래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 대한 원망감으로 자주 외박을 했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에 취해 엄마에게 쌍욕을 하고, 때린 적도 몇 번 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만취해 집에 들어와 말싸움이 시작됐는데, 내 노트북을 부수려고 하더라. 그래서 "이제 엄마보다 내가 더 힘이 세. 그러니까 좆같이 굴지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라고 하면서, 엄마의 팔에 손톱자국과 멍을 남기기도 했다.




또 만취해 들어온 엄마가 나에게 썅년, 씨발년 하면서 별 이상한 욕을 다 하더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마시던 물을 엄마에게 그대로 끼얹으며 "씨발 진짜 좆같이 행동하지 말라고. 이 무식한 년아."라고 욕을 한 적도 있다. 엄마는 그 이후로 자살을 생각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았고, 평생 사죄를 해야 할 정도로 패륜을 저지른 적도 많다. 그 이후에도 사건은 많았다. 나는 술에 취해 집 앞에서 성추행한 늙은 새끼랑 같이 살려고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사춘기 때 풀지 못한 억울함과 분함을 20대 중반이 다 돼서야 풀었다. 나는 엄마에게 무슨 존재일까? 본인의 분신이니 폭언과 폭행을 언제든지 해도 되는 인형 같은 존재일까? 작년까지만 해도 이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엄마와 밖에서 외식하면서 선언했다. "나는 엄마의 인형이 아니야. 나도 이제 성인이야. 제발 엄마랑 분리해서 생각해 줘."라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는 네가 나이를 얼마를 먹든 내 새끼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라고 합리화를 하더라.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올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래도 10년은 같이 산 대리 남편인데, 엄마도 힘들어서 그랬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올해 초, 갑자기 찾아온 번아웃 때문에 그리고 상사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 출근을 하기 전에도 울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우니 엄마가 그제야 "5년이면 고생했어. 엄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여행도 많이 다녀. 이제 그만둬, 그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더라.


이제 나이 앞자리가 바뀌니 조금씩 이해가 가는 일들이 많아졌다. 엄마를 이해할  있는 여유가 생겼다. 가부장제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며, 이혼녀라는 타이틀을 갖고 나를 혼자 키워냈을 처절함.  처절함으로 키운 자식이 인정을  해주니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 이제 조금은 엄마가 이해된다.  나를 인형 취급을 했는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언젠가 이것도 용서하게  거라고 믿는다.



나는 엄마와 영원히 평행선일까?

엄마는 육각형이고, 나는 엄마와 비슷한 교집합을 가진 조금 둥근 직사각형이지 않을까?


다른 듯 같은 우리 모녀는 같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교집합의 여성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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