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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Oct 29. 2023

부친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친의 존재에 대하여


"이제 내 앞에서 부친 새끼 미화하지 마. 사람 탈을 쓴 뱀 같은 새끼야."



소꿉친구에게 법원 판결문을 보여주면서 저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소꿉친구와 나는 8살 때부터 친구였다. 친구가 된 지 벌써 22년이나 돼버렸다. 내 소꿉친구는 나에게 가족 같은 친구이고, 친자매와 같은 존재다. 이 친구는 어쩌면 가족보다 더 나를 가장 많이 알고, 내 분노 찬 모습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친구다. 그래서인지 내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종종 좋은 말을 해주곤 한다. 3년 전, 같이 술을 마시다가 부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친구 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너를 참 아끼셨지. 너네 집에 가면 항상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너한테 3만 원, 5만 원씩 쥐어주셨던 거 기억 안 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그래도 나를 아꼈다는 그 한마디에 부친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연기였음을 잘 안다. 오늘은 내 부친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부친에 대한 첫 기억은 엄마를 때리고 있는 모습이다. 5살 무렵, 그때는 한 방에 가족이 다 같이 자는 형태였는데, 나는 엄마 말을 듣고 이불속에 숨어 나오질 않았다. 이불 밖에선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중학생 오빠가 말리는 소리, 엄마가 악을 쓰는 소리, 그리고 엄마가 부친에게 맞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때부터 소리에 대해 민감해했던 것 같다. 이게 늘 일상이었고, 종지부는 늘 경찰이 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엄마가 부친에게 생활비를 달라던가, 혹은 또 기집질을 했냐는 소리가 나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정폭력은 그 어린 나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유흥주점에 가느라 외박질을 하던 부친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엄마의 생일일 때면 이유 모를 생화 꽃다발을 주기도 했는데, 나는 그게 수많은 여자들에게 나눠줬을 그 꽃다발이라는 걸 알기에 역겨웠다. 알량한 그 꽃다발 하나로 바람피우는 자신의 상황이 무마되기를 바라는 그 심보가 어린 나에게도 보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꽃다발을 받자마자 버릴 정도로 싫어한다.  




나는 부친과 어릴 때부터 친하지 않았고, 그냥 존재 자체가 역겹고 혐오스럽다. 마치 바퀴벌레를 보는 것처럼 늘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또 바람피우고 온 부친에게 나무라자, 부친은 만삭인 엄마를 때렸다. 특히 배를 집중해서 때렸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지키기 위해, 배를 맞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다른 곳을 맞았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학창 시절에 수도 없이 들었으며,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불안함을 감지했는지 출산 예정일보다 2주 더 늦게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엄마에게 뜻밖의 아이였다. 엄마는 내가 학창 시절 때 항상 하던 말이 있는데, 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오빠를 데리고 이혼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내가 커가면서 바뀌었으며, 딸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챘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부친의 첫 모습부터 부친을 싫어했던 것 같다. 갑자기 내게 친한 척을 하는 부친의 모습을 보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날은 외할아버지 혹은 외할머니 생신이었던 것 같은데, 작은 외삼촌 집에서 자기로 한 날이었다. 노래방에서도 신나게 놀던 외가는 새벽이 될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사촌동생들과 나는 먼저 집에 들어와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술에 취한 엄마와 부친이 들어왔다. 사촌동생들의 방에 둘이서 심상치 않게 대화하더니 욕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윽고 부친이 엄마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달려가 확인해 보니, 엄마는 이미 코뼈를 붙잡고 피가 철철 나기 시작했고, 엄마는 내게 빨리 경찰에 신고하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빨리 사촌동생들에게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내가 휴지를 갖다 주러 오려는 사이에도 부친은 누워있는 엄마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더라. 나는 부친에게 하지 말라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는 더 때려보라고 나 죽고, 너 죽자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촌동생들은 경찰에 신고하고 거실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사촌동생들은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전화를 미친 듯이 걸기 시작했고, 작은 외삼촌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오고 있었다. 방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사촌동생들이 벌벌 떨며 현관문을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 방을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나는 사촌동생들의 눈을 재빨리 가렸다.




그렇게 경찰이 먼저 왔고, 외삼촌과 숙모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애써 아이들인 우리에게 걱정 말고 자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벌벌 떨고 있는 사촌동생들이 마음이 아파, 이불을 감싸주고 내가 뒤에서 안아주었음에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동생들은 내가 방바닥에 있는 피를 다 닦고 난 후에야, 진정하고 잠에 들기 시작했다. 그때 사촌동생들은 고작 유치원생들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나는 30살인 지금까지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훌쩍 커버린 동생들은 청년이 되어 굳이 말을 꺼내진 않지만, 아마 그날을 나처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부친의 목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을 텐데, 그 어린 내가 원망스럽다. 그 당시 내가 고등학생이었거나, 성인이었다면 부친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을 거라고 확신한다.




가정법원에서 내 친권과 양육권으로 부모가 싸웠을 때, 경찰관과 같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엄마를 굳이 찾아가, "네 딸년은 널 닮아서 닳았더라. 네 딸년 술집에 팔아버릴 거야."라고 말한 부친. 법원 출석일 전전날에 내게 "너는 네 애미를 닮아 재수가 없어. 하나도 나를 닮은 구석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라고 말하며 내 다리 전체가 멍이 들도록 때리던 부친.


또 기집질을 하시느라 며칠을 외박하고 집에 들어와, 인사를 하지 않는다며 오빠에게 귀싸대기를 날리며 욕하던 부친. 그날은 오빠가 부친을 먼지 나게 팼더랬다. 그 와중에 주방에서 쳐 맞고 있던 부친은 힘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기가 될만한 걸 찾더라. 그 살기 넘치는 징그러운 눈을 보고, 주방에 있던 칼과 가위, 젓가락 등등 뾰족한 건 모두 베란다 창고에 던져버리고 잠가버렸다. 그리곤 엄마에게 얼른 오라고 오빠가 부친을 때린다며 닦달했었고, 오빠는 머리끝까지 꼭지가 돌아 부친을 정말 죽일 듯이 패더라.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왜 법원에서는 엄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고 위증을 했을까. 나는 친오빠의 행동이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우리 집은 내가 살던 빌라뿐만 아니라 근처 동네에서 경찰이 늘 온다는 유명한 집이었다. 그럴 때마다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우리 집을 욕하는 능력 없는 너네 가족보다 우리 집이 더 부유하니, 엄마에게 대놓고 뭐라 하지 못하던 동네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늘 그 동네 사람들에게 사람 좋은 척을 하던 부친, 지금 생각해도 그 얼굴에 염산을 끼얹고 싶을 정도로 혐오한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다.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부친을 죽이고 싶어 할 거고, 저주할 거다. 부친이 내게 안겨준 고통과 트라우마가 없어지기나 할까? 부친이 죽어도 소용없다. 부친이 죽어서도 지옥불에 담가지길 간절히 바란다.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란다. 한때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필리핀 청부 살인을 알아볼 정도로 난 내 부친을 혐오한다. 부친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란, 친족한테 생기는 일말의 감정이 아니라, 오직 죽여버리고 싶다는 살기뿐이다.



내게 부친은 유전자 제공자일 뿐, 남은 건 바퀴벌레를 보는 것 같은 혐오감과 살기뿐이다.

누가 내게 부친을 미화한다면, 그 입 좀 닥치라고 얼굴에 물을 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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