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거, 너무 슬프지 않니?
“금붕어 가게?”
“큭큭, 수족관 말야. 근데 수족관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아쿠아리움으로 알아듣더라. 물고기 판다구 해야 알아들어. 예쁜 물고기들 파는 데 있잖아. 여기 근처야. 가볼래?”
우리는 캔맥주를 하나씩 새로 딴다. 탁 -.
“그래.”
빠져나오는 놀이터는 그때보다 정말 작게 느껴진다. 맨션 단지에 머리 위까지 높게 쳐있던 넝쿨 울타리가 유진이와 내 어깨만치 밖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울타리 바로 옆의 파란 간판의 과일 가게는 언제 문을 닫았는지 모르겠다.
“그럼 이 근처 사는 거야?”
“응. 그렇게 됐어. 할머니한텐 얘기하지마. 그럼 자꾸 오라고 한단 말이야. 참, 엄마한테도.”
“알겠어.”
“그런데 왜 물고기가게야? 유진이 너 물고기 좋아했나?”
“금붕어가게라고 해줄래? 물고기가게라고 하면 생선가게 같잖아.”
“그래, 금붕어가게.”
“아니 ... 그냥. 처음에는...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나도 집 나오구, 일할 데 찾다가 사람 구한대서 간 건데 ... 지금은 좋아. 물고기들이 예뻐. 종류가 엄청 많거든. 천천히 세상만사 헤엄치고 있는 애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마음 놓고 예뻐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거. 예쁘다, 예쁘다 해줄 수 있는 거. 그게 난 좋아.”
유진이는 알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예뻐보인다는 사실을. 나는 그냥 피식, 하고 웃었다.
“어머, 웃기니?”
“아니 ... 할머니 같아서 ...”
우리는 계속 맥주를 홀짝이며 걷고 있다. 가는 길은 바람이 덜 분다. 술기운이 우리를 덥혀 바람이 덜 차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한 동안 긴 치마 밑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유진이의 여린 발목을 바라보고 걷는다.
“여기야.”
수족관은 생각보다 꽤 크다. 통유리로 되어있는 큰 벽면에 색이 화려한 물고기들이 가득하다. 연휴라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황홀경같은 풍경 앞에 우리 둘만 맥주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우와.”
나는 넋을 꽤 놓았다.
“예쁘지?”
“응. 엄청 예쁘다. 엄청 많고, 엄청 크다.”
“그치? 오늘은 연휴라 문을 닫아서 밖에서만 봐야해. 그래도 안이 다 보이니까 괜찮지?”
“응. 진짜 예쁘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네.”
“다닌 지 4년인가 됐어. 네가 이 쪽으로 와야 말이지. 봐봐. 얘는 키싱구라미. 얘는 구피. 얘는 베타. 얘는 ... 테트라. 얜 비싸.”
“똑똑한데?”
“나도 전문가야.”
“큭큭.”
우리는 허리를 숙이고 어항을 들여다보며 킥킥 댔다. 어항에 비친 유진이의 얼굴을 본다. 그녀도 어항 안에 갇힌 예쁜 물고기 같다.
“근데 왜 하필 금붕어가게라고 해? 이렇게 예쁜 물고기가 많은데.”
“키싱구라미가게라고 하면 누가 알아듣니? 그것도 그렇고, 나는 금붕어가 제일 좋아 그냥. 빨간 금붕어.”
나와 그녀의 시선은 구석에 있는 빨간 금붕어에 머문다.
우리는 어느새 길가의 볼라드에 걸터 앉아있다.
“있잖아, 저 빨간 금붕어를 누가 나한테 주더라. 금붕어가게 직원한테 금붕어를 주다니. 웃기지? 내 앞에서 사더니, 그걸 나한테 주더라니까. 처음에는 정말 어리둥절했지. 지금 생각해봐두 정말 웃기다야. 근데 이 많은 물고기들 안에 살면서 나의 물고기 하나가 없었다는 거 말야. 그런 생각이 들지 뭐니. 그래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 내 물고기가 생겼다는 게 ...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받아버렸어. 처음이었어. 그런 사람은 ...”
그녀는 어항 너머 가게 안쪽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긴 듯 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그 의문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람을 상상한다.
“한 2년 동안 만났어. 그 사람을.”
“응..., 지금은?”
나는 대답을 했다가 문득 묻는다.
“날 잊기로, 마음 먹었대.”
“잊는다고?”
사람이 사람을 잊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응. 그래, 그렇게 마음 먹었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 나는 그 말이 참 슬프더라. 잊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된다는 거야.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거, 너무 슬프지 않니?”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나...”
나는 혼잣말로만 중얼거렸다.
“있잖아, 나 그 사람 진짜 좋아했어. 음 ... 만약에 사랑이 절벽이라면, 과연 내가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떨어질수록 계속 더 빠르게 떨어지는데, 그 가속을 난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어. 난 ... 이 사랑의 끝이 없다는 걸 확신했거든.”
그녀의 시선은 금붕어에, 나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있다. 다 울어낸 것만 같은 눈이 어쩐지 다시 촉촉해진 것 같다. 나는 그녀가 말한 사랑의 절벽을, 감히 상상해보는 중이다.
“.... 근데 왜?”
“떠나구 싶대. 그냥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매일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는 이야길 달고 살았었거든. 할머니 집에서 살 때, 내가 항상 ‘여길 벗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근데 할머니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 그냥, 벗어나고 싶었어. 어디로든지. 그 사람도 그랬겠지.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디로든지 가고 싶었던거야. 지금이 아닌 곳으로. 말릴 수가 없었어. 내가 그 마음을 제일 잘 아니까.”
“응...”
“난 엄마랑 언니랑 다르다는 말.”
“응.”
“엄만 나한테 사람이 살 곳은 누군가의 마음 속 뿐이라고. 엄만 살 곳을 찾아다니는 거라고 그랬어. 그런데 그 사람. 내가 더 이상 어딘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내가 머물고 싶다고 처음 느끼게 해준 그 사람, 내가 머물고 싶은 곳 ... 그 곳이 날 떠난 거야. 근데 말야, 나는 말야, 누군가 내 마음에 사는 거, 그거로도 되더라. 내가 머물 곳 없어도 말야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일까. 그녀의 사랑법은 어디에서 왔을까.
“언니는 미움이 사랑이었다는 거, 그걸로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지만, 난 말야 .. 미움도 사랑이라는 거 ... 그걸로 살고 싶더라. 내가 아직도 그렇게 미워하는거야. 그 사람을. 너무 미워. 여전히. 그게 날 살게 해.”
그렇게 말하는 유진이의 두 긴 속눈썹 사이로 눈동자가 촉촉이 빛난다. 하얀 피부에 추위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모를 보랏빛 홍조가 올라와있다. 그녀가 할머니 옆에 묵묵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랑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라는 사랑초. 그 옆에서 예쁘다, 예쁘다 하는 것을 보고 배우고 그대로 따라하는 사랑초.
“가자, 이제. 춥다.”
우리는 달아오른 몸을 이끌고 선선한 바람을 헤쳐 다시 할머니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할머니, 저희 돌아왔어요.”
“이이, 그려. 밥 묵으야지?”
우리만 보면 밥 얘기를 하는 할머니.
“근디 수진이는 어디 갔댜아?”
“구미에 갔잖아요, 할머니. 추석이라.”
난 왠지 갸우뚱하다.
“어어, 그졔, 마져이.”
나는 괜히 베란다의 꽃 사이로 나가 얼마 남지 않은 화분 사이에서 아까 봤던 색색의 열대어들을 떠올린다. 그 때 할머니가 묻는다.
“근디 수진이는 어디 갔댜아?”
사랑초 아래에 하얀 꽃이 떨어져 있다.
사랑초 꽃말 : 모성애, 당신을 버리지 않을게요.
검은 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