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가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

by 빵집알바생

편 가르기 현상이 사회에 만연하다. 막상 애매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세상은 어째서인지 둘로 나뉘려는 속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예로 제1•2차 세계 대전의 많은 참여국은 연합국과 동맹국, 추축국과 연합국이라는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웠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는 MBTI라는 심리검사는 성격유형을 16가지로 나눈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E/I, S/N, F/T, P/J의 두 가지 알파벳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의 조합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생존을 위해 내 편과 네 편을 나눠 살아왔다. 인간에겐 이분법적 사고가 내재화돼 있다. 모두에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하나쯤 있다는 절대적인 사실은 "나 만큼은 편 가르기를 하고 있지 않아."라는 말에서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게끔 한다. 하지만 이러한 편 가르기는 통상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개념이다. 우리는 치우치면 안 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고, 다 같이 어울려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편 가르기가 과연 정말로 나쁜 것에 불과한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왈츠(Kenneth N. Waltz)의 양극체제 안정론을 하나의 분석 틀로 사용해보고자 한다. 양극체제 안정론이란,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냉전(Cold War)처럼 강대국이 두 개만 존재할 때 국제사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이론이다. 즉 '국제사회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이분화라는 것이다. 왈츠의 이론이 국제사회의 무정부적 특성 아래 형성된 만큼, 정부가 존재하는 일반사회에 이를 그대로 적용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양극체제 안정론의 아이디어만 차용하여 본 글의 가정을 상정할 것이다. 혹시 이분화는 '일반사회의 효율' 또한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일반사회에서 편 가르기는 내 편의 결속력을 쉽게 높일 수 있게끔 한다. 예로 '복지를 찬성한다’ 혹은 '북한의 원조를 반대한다’ 라는 발언만으로 사람들은 진보 그리고 보수로 단정 지어질 수 있다. 너무나도 쉽게 말이다. 어째서 이토록 극단적인 편 가르기가 행해지는지 싶었을 것이다. 사실상 정치에서 완벽한 진보, 완벽한 보수당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소속감을 고취하기 위해 사용된다. 한쪽으로 치우친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념(ideology)에 근거했다기보다, 실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네 편'에 대한 편견을 심는 데 목적을 두고는 한다. 이는 '내 편'의 결속력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된다. 즉, '네 편'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이 '내 편'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리고 편 가르기는 일반사회의 전반적인 신중성을 키운다. 근래 대두되는 이슈 중 하나인 남녀 갈등을 보자. 남녀 갈등의 심화는 결코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이로 파생된 결과는 거센 편 가르기의 좋은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녀 갈등의 경우, 상대를 헐뜯는 데 집중하며 호들갑스럽게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덕분에 '네 편'인 타인의 고통에 예민한 사람들 또한 늘어났다. 함부로 상대에게 남성스러움, 그리고 여성스러움의 요소를 논하지 않는 것, 즉 서로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된 것은 격한 편 가르기의 긍정적인 작용 현상이라 볼 수 있겠다.


편 가르기는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속성이라 단박에 그만할 수도 없다. 앞 단락으로부터 이분법적 사고는 마냥 나쁘지 않다는 게 밝혀진 이상, 편 가르기를 잘만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부정적으로만 여겨지던, 하지만 멈출 수 없는 이분화를 '일반사회의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낼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교육받아온 대로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 같이 어울리고, 만에 하나 치우치더라도 구심점만큼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내 편이든, 네 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사회에 속해 있는 구성원이라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네 편'을 멋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내 편'의 가치를 높이는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격이다. 이러한 안일한 태도는 편 가르기를 잘 활용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됨을 알아야 한다. 우린 한 편만이 잘되는 것을 두고 일반사회의 효율을 높이는 법이라고 일컫지 않는다.


나아가 어쩔 수 없이 한쪽 극단에서 생각하게 될지언정 반대쪽 극단에서도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편 가르기를 마치 열정적인 찬반 토론장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우리는 토론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있는 청중이 되는 것이다. 편 가르기를 통해 양쪽으로 치우쳐진 의견을 모두 듣고, 최선과 최악을 상정할 줄 알아야 하며, 나아가 이를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살색이라는 명칭이 사라진 지 꽤 됐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완벽하게 빨갛거나 파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채야만 했다. 양극으로 나뉜 스펙트럼으로부터 우리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 나아가야만 하지, 물드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특별한 삶을 작은 흑백그림으로만 구성하기엔 사람 개개인의 능력은 너무나도 다채롭다. 편 가르기가 내재화된 세상에 묻어가기보다 이를 역으로 잘 활용해 보는 건 어떨까. 휩쓸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 가는 일이라면 주저 없이, 그리고 후회 없이 자기 힘닿는 데까지 참여해서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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