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를 이르는 말인데요.
당시는 매일같이 시민들과 서울 시내 전 대학생들이
속속 서울역 앞으로 모여드는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전두환 군부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아
언론조차도 이대로 민주화가 달성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는데요.
하지만 군부는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작전의 시작은 5월 17일.
군부는 전국 대학생 대표 회의가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며 시작됐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수많은 대학생 대표들과 이화여대생들은 군용 트럭에 태워져 한 부대에 내려졌는데요.
약 40여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신음과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불안, 좀 더 직접적으로는
당연히 가해질 고문의 공포에 떨었는데요.
바로 이 현장에, 해당 부대의 전투 경찰로 김진명 작가가 있었습니다.
김진명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이들이 갇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불안하고 무섭겠지만 여러분이 이곳에 살아서 들어왔듯
역시 살아서 나갑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시작한 김진명 작가의 위로의 변은 어느 순간 위험 수위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여러분은 옳은 일을 했고 여러분이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길 것입니다.
비록 지금 군사독재의 폭압이 이 나라를 짓누르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조국은 여러분들에게 헌사를 바칠 것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이 어려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저는 미력이나마 여러분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김진명 작가의 변설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위험했는데요.
그 현장에는 M16에 총검을 꽂은 채 학생들을 지키고 있던 세 사람의 헌병들이 있었습니다.
세 명의 헌병은 청와대 헌병경호대인 33헌병대 소속으로
독재자를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 부대이다 보니 부대 기합은 가혹했으며
당연히 데모나 시위를 하는 자들을 보는 시각 또한 정보과 형사 못지 않았습니다.
이런 헌병대가 김진명 작가에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2가지였는데요.
학생들과 같은 자세로 꿇린 후 수사관들에게 보고하는 것,
그냥 침묵하고 있다가 사후에 수사관들에게 몰래 보고하는 것.
과연 헌병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때로는 행복 대신 불행을 택하기도 한다>를 확인해 보세요.
김진명 작가의 첫 에세이『때로는 행복 대신 불행을 택하기도 한다』가 궁금하다면?
▶교보문고
▶YES24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