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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날 현 Mar 21. 2023

그래, 차라리 부럽다고 할 걸 그랬나.

내가 선택하지 못한 삶의 아름다움

오랜 친구 J를 만나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뱃속이 더부룩했다. 언제부터인가 J를 만나고 올 때면 그랬다. 나를 바라보던 표정과 눈빛, 그리고 나를 만날 때마다 하는 말 한마디가 채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힘들겠다."


언제부터인가 J는 내게 그 말을 자주 했다. 딱히 내쪽에서 힘든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심지어는 자랑이랍시고 한 얘기에도 그랬다. 흔히 건네는 공감의 표현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왜인지 그 말이 매번 삼켜지지가 않았다. J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날 며칠을 그 말을 소화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J를 만나기로 약속이 잡히면 나도 모르게 최근의 내 일상이 얼마나 '힘들지 않았는지'를 생각하며 약속장소에 나가곤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 혹여라도 J가 나를 안타깝게 여길까 봐 단어를 고르고 에피소드를 골라 이야기를 했다.


J는 나와 십여 년을 알고 지낸 내 대학 동창이다. 그저 그렇게 알고 지낸 정도가 아니라, 내 속을 발랑 까보여도 부끄럽지 않았던 내 제일 친한 친구였더랬다. 대학 시절, 전공이 같았던 우리는 1학년때부터 수강 신청을 똑같이 해서 전공과목은 물론이고 교양과목까지 나란히 들었고, 과내 동아리 활동도 함께 했다. 사는 지역까지 똑같았던 우리는 하굣길에 전철에서도 나란히 앉아 집으로 오곤 했다. 밤에는 각자 집에 가서 잠만 자고 아침에 나와서 똑같은 전철에 앉아 등교를 했다. 나에 대해서라면 J가 모르는 일이 없었고, J에 대해서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있음에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거울을 보듯 서로가 서로에게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반짝이던 대학시절은 반짝하는 새에 지나가버리고, 그 시절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에 우리는 와있다. 이제는 J와 한 두 달에 한 번씩 만나서 겨우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J는 나를 꼭 안타깝게 여기는 것만 같다. 그 말투가 묘하게 신경쓰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부터일까. 아님 학원강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밤낮이 바뀐 채로 살기 시작한 때부터일까.


J와의 만남을 곱씹으면서 속이 부글거린 채로 며칠을 지낸 끝에 나는 알고야 말았다. 사실은 내가 지금의 J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말이다.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도, 학원강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모두에게는 당당하고 떳떳할지언정 J에게만큼은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음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다정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지금은 2세를 고민하고 있는 그녀의 삶의 한 조각이 부러웠음을 말이다. 돌아보면, 저녁을 먹는 내내 J는 툴툴거리듯 일상의 피곤함을 토로했고 그 부분이 나에게는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게다. 부러운데 부럽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부러운 삶을 사는 이의 사소한 불평을 듣고 있자니 눈꼴이 시려워, J의 '힘들겠다'는 말 한마디조차도 나는 삼키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힘들었겠다는 말이 삼켜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J에 대한 나의 못난 자격지심이 목에 걸려서 채 넘어가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같아지지 못했음에 외로움과 박탈감, 소외감과 피해의식을 느끼며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사람보다는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에 자부심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후회하며 삶을 부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보다는 그 속에서 그래도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내 삶은 내 삶대로 좋았다고 꿈꾸듯 말하는 사람 곁에 머무르면 좋겠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아무런 비웃음이나 열등감, 시기나 조롱, 질투나 피해의식 없이 바라봐주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삶에는 내가 반드시 부러워할 만한 어느 지점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도 나의 삶을 어느 면에서는 부러워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를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서로가 더 멋진 삶으로 인도되어 가기를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사람과 좋은 오후를 보내고 싶다. 저녁에는 아쉬움 없이 헤어지고 일 년 뒤에 다시 만나, 서로의 부러운 삶에 대해 또 어느 한 나절 이야기하면 좋겠다. 헤어지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삶은 참 부럽고 아름답군요. 그런데 내 삶도 참 멋지고 살아보고 싶지 않습니까?'

- 정지우,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中



네 삶도 부럽지만 내 삶도 부러워해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나 보다. 그 시절에 그랬듯 지금도 내게는 네가 자부심이듯이 너도 나를 자랑스러워해 주기를, 나는 베베 꼬인 마음으로 혼자서 바라고 있었나 보다. 괜한 자존심에 제일 친한 친구라는 J에게조차도 부럽다는 말은 하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힘들겠다는 말 대신에 날 부러워해다오. 그 말을 채 못 하고 '힘들겠다'는 말에 채하기만 여러 번 반복하는 건 이제 더는 못하겠으니, 여기에나마 털어놓는 걸로 소화시키려는 나를 J가 알아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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