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아
이젠 에어컨을 틀고 자면 기침을 하며 깬다. 뭘 했나 싶은데 올해도 착실히 시간은 흘러갔다. 얼굴을 보면 우둘투둘하고 퍼석한 것이 시간이 쓸고 간 흔적이 보인다.
박이 대학원 졸업식에 불렀다. 돈이 7000원밖에 없어 못 간다 했다. 자기가 교통비를 줄 테니 오라는 박의 말에 결국 서울에 다녀왔다. 박은 기차,버스표에 점심 저녁 빙수에 음료까지 샀다. 내가 뭐라고.
간만에 희망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꺼냈다. 박은 자기가 취업을 하면 투룸을 구할테니 같이 와서 사람답게 좀 살아보지? 라는 말에 알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간만의 자극. 약간 생기가 돌았다. 알바 공고를 뒤져봤다. 몇 주 전 넣은 알바는 모두 떨어졌다. 전에 일하던 카레집에 전화를 했다. 자리가 있냐고 물었다. 어딘가 애매한 체인점인 카레집엔 점장이 바뀌어 있었고 예전에 일하던 미스터 김이에요 라고 해도 '브레이크 타임, 쓰리 투 빠이브 어클락' 이라는 말만 계속했다. 거짓말. 반 년 일하면서 한 번도 그 시간에 손님 안 받은 적이 없는데. 잠시 일했던 다른 지점에 전화했다. 자리가 있냐고 했다. 알바생이 학생이라 9월이 되면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연산이구나, 한 번 놀러와~ 하는 빈말에 알겠다고 했으나 7000원으로는 시내버스비도 부담되기에 가진 못하고 이틀쯤 있다 다시 전화를 했다. 뜨뜻미지근한 대화가 잠깐 오가고 거의 매달리다시피하며 사장에게 내 번호로 꼭 전화달라고 부탁을 했다. 거의 구걸이다. 좀 많이 침울해졌다.
담배 중 연초는 피우기를 멈춘 지 1주일이 되어간다. 담뱃값을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 생산활동이라고는 1도 없는 내게 담배는 사치품목이다. 술을 참 잘 사주는 친구의 연락에 못 간다 했다. 내 딴에 '품위 유지비'라는 게 있다. 저 친구가 술값을 내면 내가 하다못해 동전노래방 값이라도 내야 하는 그런 거. 그런 품위유지비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 술이 안 땡겼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냥 참았다. 친구에겐 야 나 자꾸 그러면 거지근성 밴다, 라고 했다. 괜시리 그 친구가 날 배려해서 자기 카드를 넘겨주고 '어우 연산아 잘먹었다' 라고 했던 일이 떠오른다.
아, 그 친구를 통해 담배를 처음 시작했다. 물론 계기는 인간관계와 생각같지 않은 상황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어지럽게 엉킨 거였지만, 그는 그가 어째건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게 자기 책임이 일정부분 있다고 생각했는지 금연을 권했다. 전자담배까진 바로 끊진 못하겠으나, 그러마고 했다.
글을 잘 못 읽는다. 빌려온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정신이 산만하다기보다 산산조각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다니, 상당히 신기한 일이다.
요새는 일어나면 그냥 게임을 한다. 이것도 돈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돈이 모자라고, 캐릭터의 장비가 약하니 마왕을 잡을 수 없고, 마왕을 잡으려면 돈을 부어야 하고. 기가 차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인생이 즐겁지 않은 지금 정신이나마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야 될 것 같다는 변명 아래 하고 있다. 와중에 돈 없으면 대체 굴러가는 게 뭔가 싶었다.
사촌에게 10만원을 빌렸다. 결국. 보험비 만 원, 교통비 대충 5000원, 그리고 병원비 명목이었다. 이젠 이 나이가 되니 친구들에게 얻어먹고 돈을 빌리고 하는 일이 조심스러움을 넘어 많이 창피하고 부끄럽다. 자존심을 꾹 누르고 공장 알바도 알아보았으나, 자리가 없다거나, 내 체격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의욕이 없다는 건 식욕,수면욕,성욕 모두 떨어져 있다는건데, 개중 식욕이 유독 떨어졌다. 빈 지도 모르고 '먹긴 해야하는데' 하다가 배가 텅텅 비어 더는 못 견디겠다 하면 음식을 아무렇게나 한 그릇에 몰아넣고 욱여넣는다. 53kg까지 올라갔었는데, 다시 47kg대에 진입했다. 사람이 체력이 모자라서 그런건지 정신력이 모자라서 그런건지 둘이 상호보완을 하는 건지 몸이 약하니 정신도 약해지고, 정신이 약하니 몸을 쓸 동기조차 더 약해진다.
9월이 지나면 깨워주세요 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정확한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글로리로 유명세를 탄 임지연 배우가 나오는데, 그 영화를 꿰뚫는 노래는 미국의 그린데이라는 밴드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 '9월이 지나면 깨워주세요' 이다. 여름도 지나고, 내 삶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지금 나는 그냥 겨울잠같은 가을잠이 자고싶다. 9월 내내 잠을 잘 수 있다면 좀 나을까. 일어나면 현실을 다시금 마주해야한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나, 집의 밥벌레가 된 나, 볼품없고 형편없어진 외모, 어색한 침묵을 불러오는 사회성. 등등.
9월이 지나면 깨워줬으면 한다. 내 현실은 가혹하진 않다. 누가 날 죽이겠다고 쫒아오는 것도 아니고, 패악질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는 내가 나인 게 너무 형편없고 황폐하다.
9월이 지나면 깨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