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IT기업 구조조정, 그 후의 이야기

by 은하수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어떤 기억은 너무 아파서 형체는 흐릿해 질지언정, 무뎌지진 않는다. 내게는 지난 해 여름이 꼭 그랬다. 작년 여름은 두 팔에 뜨겁게 내리쬐던 햇빛 만큼이나 선명한 계절로 남아있다. 왠지 내 인생은 꼭 지기만 하는 것 같다고, 처음으로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2022년 여름은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스타트업에 한파가 덮친, 아프도록 뜨거운 여름이었다. 전 세계를 강타한 IT기업 구조조정 칼바람에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겨우 스물일곱에 실직자가 됐다. 가끔 실직자라는 단어를 되뇌이며 자조하곤 했다. 이런 단어는 뉴스에서나 봤는데, 하고. 세상은 대체 나를 얼마나 더 강하게 키우려는 걸까 되묻기도 하면서.


에이 그럴 수도 있지, 혼자 되뇌이곤 했지만 상처는 곧 크기를 키웠다. 부풀어 오른 상처는 겨우내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를 톡 건드렸다. 나도 알았다. 나는 괜찮지 않다는 걸. 그럼에도 쉽게 무너지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쓰고 또 썼다. 그때 이 문장을 읽었더라면 조금 덜,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을 100%에 수렴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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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졌다. 아니 자주 졌다. 하지만 결국 무너지진 않았다. 그때의 나를 끄집어내준 동력은 뭐였을까? 지금에서야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리고 그건 희망이었다고, 이제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살고 싶다고. 그럼에도 나는 행복하고 싶다고. 나도 잘 살 수 있다고.

두번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돌아가서 꼭 말해주어야지. 맞아, 너는 곧 행복해질 거라고. 너의 낙관이 옳았다고. 미래를 기억하라고.


길고 아팠던 그 시간들을 지나, 나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산다. 삶이 따분하다며 불평하다가도, 벚꽃 핀 나무 한 그루에 행복해하고. 상사의 칭찬 한 마디에 기뻐하다가, 맘처럼 풀리지 않는 사회생활에 눈물 찔끔 흘리기도 하면서. 그때의 상처는 다 잊은 양, 이기기만 하는 인생은 재미없다고 함부로 조언하면서. 그래, 삶은 이다지도 흥미로운걸.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중략)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면, 나는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더 져볼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