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계몽되었습니다"

계몽의 정치와 민주주의

by 이든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얼마 전, 탄핵 심판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변호인이 남긴 한마디가 화제가 되었다. 법정에서 ‘계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낯설지만, 마치 신앙고백과 같은 어감 자체가 다소 기이하다.


계몽(啓蒙: 어둠에서 깨움, enlightenment: 빛을 비춤)이란,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일이다. 보통 우리는 계몽이라는 말을 교육, 지식, 혹은 사회진보의 맥락에서 떠올린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에서 계몽은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해 왔다.


개화기에는 서구적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문명개화’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근대화 논리와 맞물려 계몽이 ‘선진 문명으로의 진입’이라는 논리로 포장되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국민 계몽’이 강조되며, 국민들은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강조했다.


계몽 담론은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깨어 있다’는 서사는 반복되었다. 한쪽에서는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모른다’며 계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는 자유를 위해 깨어 있다’며 상대를 무지한 자로 규정한다. 계몽이 곧 정치적 도구가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들어 계몽이라는 개념을 주로 활용한 것은 소위 진보 진영이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 교육, 인권 의식, 젠더 감수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특히, 여러 정치적 문제의 원인으로 언급된 ‘역사 교육의 부재’라는 수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번 탄핵 심판에서 내란 진영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변호인이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고도 우스꽝스럽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정치에서 ‘계몽’이 깨달음의 과정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금 드러낸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무지한 스승』에서 기존의 계몽 방식이 지식과 권력의 위계를 고착화한다고 비판했다. 전통적인 교육 모델에서는 ‘앎을 가진 자(스승)’가 ‘무지한 자(학생)’를 가르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학생은 끊임없이 스승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남게 된다. 즉, 계몽이라는 행위가 실질적으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위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지한 스승’을 제시했다. 진정한 교육이란, 지식을 가진 자가 무지한 자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동등한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학습자가 스스로 사고하고 탐구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 철학을 넘어, 민주적 사고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개인적 변화의 선언을 넘어, ‘계몽된 자’와 ‘아직 계몽되지 않은 자’라는 구도를 전제하고 있다. 즉, 계몽은 어떤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이를 인식한 사람과 아직 인식하지 못한 사람 사이의 위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정치적 담론에서 계몽의 논리는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국민을 ‘아직 배우지 못한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더 많이 아는 자’가 ‘덜 아는 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가 정당화된다. 이는 민주적 토론과 평등한 사고 과정이 아니라, 권력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가 더 계몽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민주적인 사고와 토론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랑시에르의 철학을 따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계몽된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동등한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근대의 유산인 ‘계몽’을 넘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주체로서 사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회를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이야말로 할부로 얻어낸 민주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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