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쓰는 쪽을 택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과 글쓰기

by 이든

요즘 내 신경은 온통 팽창하는 자아를 다스리는 데 쓰이고 있다. 다섯 살 난 남자아이처럼, 힘껏 붙잡지 않으면 온종일 쏘아다니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예기치 못한 변화나 병으로 힘이 부족할 때면 어김없이 사고의 무게중심이 오직 나로 쏠리곤 한다.

그렇게 고인 자아의 조각들은 나를 닦달한다. 누구나 으레 겪는 사건 앞에서 나의 생득적 결함을 꺼내든다. 잘 되지 않으면 내가 부족해서, 흔들리면 내가 일관되지 못해서, 버티지 못하면 내가 나약해서. 생각의 끝은 그렇게 내게로 수렴하고, 나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가련한 되먹임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선생 삼았다. 그는 '절망'을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관의 관계가 어그러진 상태로 보았다. 앞선 나의 상태와 같이 삶의 모든 근거를 오직 내게서 구하는 것 또한 절망의 한 형태이며,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나는 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동시에 연민의 대상으로 붙잡았다. 스스로를 부족하다 판단하면서도 그 부족함의 책임조차 내게 돌린다. 그 책임이 무거워 자신에게 위로를 요구하는 이 추태는, 끝끝내 내 안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나는, 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선생이 말하길, "죄가 되는 절망은,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치 않거나,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왜 신 앞에서도 자신이라는 대상을 놓지 못하고 키워만 가는 것일까. 나는 왜 나를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내게서 벗어날 권리는 쥐고 있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이 절망의 시기는 글쓰기를 멈춘 시기와 겹쳐 있었다. 글을 멈추자 나와 자아의 관계가 밀착되었다. 나는 내게 투명하게 미끄러졌고 마음엔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내겐 나를 나로부터 떼어놔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경험하기로, 글은 살찐 자아를 해체하고 제한하며 객관화시킨다. 글은 나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를 내게 전부 맡기는 일만은 밀어낼 것이다. 그럼에도 자아는 다시 팽창할 것이고, 생각도 다시 내게 수렴할 것이다. 나는 분명히 다시 절망할 것이다. 그래서 올해의 나는 쓰는 쪽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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