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노년의 삶을 상상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내게 노년이란 말은 이룬 것을 정리하는, 남길 것을 살피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엇을 이루었는지보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로 설명되는 지금의 나는, 가까운 중년의 삶을 상상하기에도 숨이 찬다.
모순되게도,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는 질문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반드시 먼 시간의 상을 당겨 현재와 잇기 마련이다. 그래서일지, 정작 나의 노년을 말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이 편치 않다.
원래도 빠른 편이 아니건만, 앞날의 모습을 그려내는 일은 나를 더 굼뜨게 만든다. 아직 나에 대해 무엇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시점에 마무리를 말하는 것이 성급하다고 느껴진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말이 지금의 나를 움직일 것만 같은데, 그렇게 이끌릴 방향에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아직'을 꺼내든다. 아직은 일러, 아직은 몰라, 아직은 내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충분히 알고 충분히 준비된 후에야, 이것을 말할 자격이 생길 테니. 나는 나의 속도에 맞추어 생각하고 싶다고.
교사들의 교사, 파커 파머는 나이 듦에 관한 책,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노년의 시기를 정리나 물러남이 아닌,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숨길 수 없는 시간으로 썼다. 그의 문장은 노년을 말하는 일의 무게를 더한다. 동시에, 나의 망설임이 나의 살아갈 태도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충분히 알게 된 뒤에야 다음으로 가고자 했다. 내가 생각하는 충분을 채우지 못해 멈춘 시간을 성실이라 되뇌면서도, 결단하지 못하는 괴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직, 아직, 아직을 말하며 내딛음을 지연시켰다.
노년을 말하기 어려운 지금의 느림도 그 연장선에 있다. 미지의 시간을, 아직 살아보지 않은 존재의 형상을 언어로 고정하는 일이 두렵다. 말은 길을 만들고 현재를 속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쓰다 보니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충분함을 기다리다 끝내 도착하지 못하는 삶의 곁에는, 모름을 품고 발을 떼는 삶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