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는 존재로 남아 있기

by 이든

문득 생각해 보니, 나는 무언가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그래왔다. 학창 시절 내내 적었던 장래희망은 늘 적당히 골라잡은 단어였으며, 그 단어들은 나의 것이라는 감각이 없었다.

지금도 학위를 받으면 무엇이 되고 싶느냐는 질문이 조금은 곤란스럽다. 학자는 정체성이니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겠다고 대답하지만, 진정으로 그것이 내가 되고 싶은 것인지 확신은 없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나 거짓을 말한 듯 한 죄책감이 몸에 튄다.

그럼에도 늘 하고 싶은 것은 있었다. 십 대의 막바지에는, 사람에게 무언가 좋은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이 교사나 목사, 상담사 같은 직업으로 불리는 것은 또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기독교교육'이라는, 그 모든 것에 걸쳐있으면서 애매하기로 짝이 없는 전공을 선택했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면, 단지 읽고 써서 말하고 싶다. 십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글은 준비할 수 있고 주워 담을 수 있어서다. 나의 모든 독서와 집필은 이것으로 살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또 '교육과정학'이라는, 교육학 중에서도 모학문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모호한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글쓰기라는 도구를 얻은 뒤 나에 대해 알게 된 한 가지가 있다면, 나는 프로불편러,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이 이럴 수밖에 없는지에 늘 속이 들끓었다. 그간 말하고 싶었던 모든 욕망이 여기에 있었을지 모른다. 이 화를 페이스북과 브런치에, 오마이뉴스에, 지금은 사라진 얼룩소와 서울라이트디스패치에 풀어내며 소화했다.

당연하게도 아무개인 나는 말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럼에도 말하기를 지속하고 싶은 것은 무엇을 위함일지 생각한다. 인정이 필요한가, 노출되고 싶은가. 아니, 나는 그저 불편함 앞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잠잠한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쓸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잠시라도 출연하고 싶었다.

최근 내가 탐독하는 교육학자, 비에스타는 교육의 한 목적을 '주체화(subjectivation)'로 규정했다. 교육은 사회화도 시키고, 직업을 얻게 자격화도 시켜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체란, 세계가 말을 걸어올 때 자신의 말로 응답할 수 있는 존재다.

이 대목에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가깝게나마 설명할 말을 얻었다. 나의 불편함은 세계가 내게 말을 거는 방식이며, 나는 거기에 침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응답의 방식은 쉬운 판단보다 책임 있는 개방성이면 좋겠다. 그것이 주체로서의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서 내가 속한 교육과정학을 모호하다 말했으나, 나는 그 모호함이 좋다. 방향을 제시하거나 인과관계를 검증하고 처방하여 명쾌한 답을 얻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최선인지, 무엇이 질문으로 남아야 하는지 묻는 태도가 내가 세계에 응답하는 적절한 방식으로 느껴진다. 나는 늘 답을 내리는 사람이 아닌, 질문에 머무는 사람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이 소란스러워 뉴스를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날카로운 단정으로 벼려진 말들이 쏟아지는 탓에, 내가 머물 자리를 찾기 어렵다. 대신 나는 내가 견딜 수 있는 속도로 세계를 받아들여 보려 한다. 여전히 읽고 쓰고 말하면서, 내가 응답해야 할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매거진의 이전글노년을 말하기 어렵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