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진 세계에서 되돌려 쓰기
한컴오피스에서 '국민학교'를 입력하면, 스페이스 바를 누르는 순간 '초등학교'로 치환된다. 강제성도 상당히 높다. '국민학교'를 써야 할 때면 늘 스페이스바를 눌러 바뀌기를 기다린다. 커서를 몇 칸 당겨 백스페이스를 두 번, 그리고 다시 '국민'을 채워 넣는다. 한 단락을 넘어간 뒤에도 혹시 또 '초등'으로 바뀌었을지 몰라 흘겨본다.
근현대 교육사를 다루다 보면 '국민학교'를 수십 번은 입력해야 하는데, 그 모든 순간마다 저 행동을 거쳐야 한다. 자동 교정 규칙에서 '국민학교 → 초등학교'를 삭제해도 그 순간뿐, 문서를 다시 열면 초기화된다. 감정의 수위를 두 단계쯤 낮춰 표현하자면, 그간 삼킨 한숨이 한 자루를 채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본 제국의 잔재라는 이유로 폐기된 지 30년이 흘렀다. 기초교육에서 국가주의적 색채가 빠진 것은 마땅히 환영할 변화다. 현재 사용되지 않는 사어를 빨간 밑줄로 표시해 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 맥락과 상관없이 '바른 용어'로 강제 교정하는 시스템은 불편하고, 위험해 보인다.
이 자동 교정은 내가 누구고 무엇을 쓰려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21세기 교양인의 사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리고 한글과컴퓨터가 공공기관과 교육기관, 국내 학술환경의 표준으로 있는 이상, 이 판단은 문서를 다루는 거의 모든 한국인에게 강제된다. 한컴에서 쓰지 않기로 결정한 단어는 누구도 쓸 수 없다는 것처럼.
반면, 또 하나의 옛 용어인 '문교부'는 '교육부'로 교정되지 않는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문교부는 단순히 오래된 용어이며, 국민학교는 일종의 정치적 판단으로 폐기를 결정한 용어라는 점이 다르다. 특히 '학교'에 이런 가치판단의 강제성이 드러나는 일은 공교롭다. 가르침은 늘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지울지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동 교정은 묻지도 알려주지도 않는다. 내가 왜 이 단어를 쓰려했는지 관심이 없다. 왜 이 말이 바뀌어야 하는지, 바뀌는 것과 남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규칙으로 조용히 고치며, 바르게 고쳐진 결과만 남긴다. 그 자리에는 어떤 표식도 남지 않는다.
알려주는 것과 고쳐주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그 사실을 통해 판단할 여지를 남기며, 후자는 사용자의 판단을 소거한다. 이 용어가 옳은지 그른지는 내가 아닌 알고리즘이 판단하게 된다. 남이 해주는 판단은 편리하지만, 그곳에는 어떤 고민도 발생하지 않으며 개성도 사유도 남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는 행동이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고쳐진 '초등학교'만은 고집스럽게 '국민학교'로 되돌린다. 생각마저 남이 해주는 편리한 세상에서, 소심하게 남기는 저항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