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을 읽고 에세이 <11화>

김호연 장편소설

by 박진권


[산해진미 도시락]

[1] 염세적인 마음에 완전히 침식되기 전 열여덟 어릴 때의 일이다. 나는 종로5가역의 어떤 출구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올랐고, 계단 중턱에 기괴한 자세로 앉아 있는 노숙자에게 천 원을 던져두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그 행위에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러한 행동들이 당연한 것이었고,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 같이 다니던 무리 중 두 명이 대뜸 이런 말을 했다. 한 명은 "착한 척하네"라며 조소를 날렸고, 다른 한 명은 이죽거리며 "저 노숙자 새끼들 저 돈으로 술 사 먹는다."라며 비아냥거렸다. '선행도 숨어서 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 전철 시간을 앞당겨 탔다. 그렇게 그들이 말하는 착한 척을 지속했다.


이제는 저러한 선행을 위해 선뜻 나서지 못한다. 심지어 노숙자들을 증오한 적도 있다. 그들은 사회의 암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도울 사람 천지인데 사지 멀쩡한 노숙자들을 도울 여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쏟을 관심을 장애 아동이나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힘쓰고 싶다.


나는 어느새 불행한 이들의 등급을 나누고 선행에 차등을 두었다. 어느 길로 향하든 선은 선인데 말이다. 나이가 많아진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열여덟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니까.




[2] 내가 했던 행동과 지난 일은 떠올리지 못한 채 타인들의 평가에 서운해한다. 간혹 서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은연중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정말 잘못이 없어서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게 아니다. 잘못이 있고 그 잘못을 내가 아는데, 어느 정도의 잘못인지 정확히 가늠이 되지 않을 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흘러들어온다. 그럴 때면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만 생각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라고 말이다.




[3]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맞다. 드물게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인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직접 나서서 만들었다. 사람이 필요해서 모임을 나갔고, 연인이 필요해 구애를 했다. 그렇게 지인들과, 연인이 생겼다. 인연을 만드는 데 있어서 '좋은 인연이 생겼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방구석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나야 좋은 인연이 생긴다.


이처럼 인연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누구나 조금의 노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그러니 만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일단 만나기라도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총도 없이 전장에 나서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인연은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런 인연을 유지하는 방법은 매일 연락하고, 그들에게 매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소한 연락 한 번과 일시적인 공동작업이면 족하다. 여러 인연을 만들어 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들과 협업을 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인연들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이미 답이 나왔다. '협업이 필요하면 정중하게 연락하라'와 '그들과의 마찰을 피해라'이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인연들이 주변에 있어왔다. 다들 각자의 고유한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다. 그들과는 언제 연락해도 어색하지만 언제든 연락은 할 수 있는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어떻게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나가길 염원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더 많은 인연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글을 써야 한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협업관계를 위해서 말이다.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

[1] 남의 실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괴물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에는 의연하지만 타인의 실수에는 공격적으로 물어뜯으려고 온갖 발광을 한다. 심지어 없는 실수도 만들어내는 역겨운 모습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그들을 멀리서 지켜볼 때면 '저게 사람이 맞긴 한가.'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그들을 상대할 방법은 없다. 그저 무시하거나 피하는 게 최선이다. 맞서서 대응하기에 그들은 겁이 많고 졸렬하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없어 당당하게 '그래, 내가 그랬다.'라는 표명을 하지 못한다. 뒤에서 헐뜯는 게 일상이 된 그들에게 대면은 없는 단어다.




[2] 나의 꿈은 여러 갈래가 있다. 그중 하나는 이렇다. 시골의 중산간 지역의 깊은 곳 허름하지만 나름 뼈대 있는 집이면 좋겠다. 작은 테이블 하나 두고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그런 집에서 평생 책과 함께 글을 쓰며 인생을 살아내는 꿈을 꾼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만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보금자리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결국 본질은 같지 않을까.




[3] 서른이 4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딱히 무엇이 변할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체력이 좋지 않아 하루 일과를 겨우 보냈고, 중반의 나는 불안함에 매몰되어 있어서 허송세월과 함께 자조만 하며 지냈다. 그런데 후반에 들어설 무렵에는 꾸준한 운동을 했고 영양제도 잘 챙겨 먹었다. 그리고 금연 덕분에 더욱 건강해졌다. 술도 마시지 않으니 지방간 걱정도 덜었다. 금전적인 부분도 당연히 많이 나아졌다. 사람들이 그렇게 겁먹고 놀라는 서른인데, 나는 오히려 좋다. 서른이 반갑기까지 하다. 반갑고도 긴 서른이 기대된다.




[4] 내가 텅 빈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종종 있다. 그런데 항상 마지막 생각은 같다. '일단 살아보자.' 그냥 살아보는 거다. 아무리 힘들고, 먹먹하고 고통스러워도, 살아보는 거다. 앞으로 얼마나 큰 고통이 있을지,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버틸 수 있을지, 그 버팀목이 언제까지 건재할지는 절대 알 수 없다. 나를 지탱하는 무언가가 점점 유약해질지 아니면 오히려 단단해질지도 알 수 없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로 다 형용이 되지 않아도, 일단은 살아본다.




[삼각김밥의 용도]

[1]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타인의 문제점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를 제외한 모든 타자들의 문제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완전히 배제한 상태의 오만한 생각이다.


그들은 반대로 타인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변질된다고 음해한다. 그러니까, 나쁜 점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선량한 마음씨는 언젠가는 변색된다고 주창한다.


사람은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해 무조건 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변화에 대해서 남들의 의견은 배제해도 좋다. 그들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는 순간, 아니 부분이라도 받아들인다면 변화가 아닌 변형이 따라올 테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타인의 변화에 대해서 야기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은 남들을 입맛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는 무가치하고 역겨운 벌레들이기 때문이다. 그 벌레들이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다. 자신의 기준에서 어긋난 사람에게 엄벌을 내리고, 그들의 자존감을 마구 훼손시킨다. 그들은 자신에게 절대복종하고 충성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를 원한다. 미친 벌레들의 농간에 당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을 믿으라는 말이 있다. 과신과 맹신과는 다른 순수한 믿음 말이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타인의 악의적인 속삭임은 단호히 절단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있어야 남도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는 타인도 없다. 스스로가 올곧아야 주변의 소중한 사람도 지킬 수 있다. 겨우 손톱만 한 벌레들에게 휘둘리기엔 인생이 너무도 짧다.




[2]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라는 말도 확신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든다. 확실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지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있을까. 먼 미래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당장 내일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확신의 삶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확신에서 다가오는 절망을 여러 번 감당하긴 싫다. 그래서 확신을 버렸다. 그렇게 행복에 한발 짝 더 가까워졌다. 물론 나에게도 확신은 있다. 꿈을 이루겠다는 막연함과, 그것에 대해 달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 확신 말이다. 당연히 내 확신을 배신했을 때의 후폭풍은 절대 감당할 수 없을 테다. 이렇게 하나의 확신도 죽을 만큼 버거운데, 세상 살아가면서 여러 개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발상이다. 차라리 온몸을 갈기갈기 찢는 게 덜 고통스럽겠다.




[3] 나는 항상 판단을 보류한다. 이유는, 어떤 부당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꼭 맞서지 않아도 될 일에도 그들은 주체를 하지 못한다. 그들은 심지가 곧거나, 고지식하다. 또는 섬세하거나 강박적이다. 그리고 이타적이거나, 오지랖이 넓다.


심지가 곧고 섬세하며 이타적인 사람이, 고지식하고 강박적이며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사람들은 다르게 판단한다. 한 사람의 평판이 요동치는 이유는 각기 다른 삶을 살아낸 서로 다른 눈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종 발생하는 오류는, 다름을 틀린 것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편견은 좋은 인연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보류하는 방법을 배웠다.




[4] 감히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말하자면, 나는 용서를 잘하지 못한다. 증오와 미움을 만들어낼 줄은 알지만, 거둘 줄을 모른다. 어떤 관계를 끝내는 일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썩혀두지 않는다. 매번 발휘하는 관계 끊기의 기술은 효과적이다. 좋은 인연 나쁜 인연 모두 내 곁을 오랫동안 지키거나 탐내지 못하고 이내 떠나간다. 쉽게 말해 지친다. 그들의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킨 나는 뿌듯하게 다시 홀로 걷기 시작한다.


위 글을 보고 '맞아, 이런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스스로가 좋은 인연이었는지, 나쁜 인연이었는지 명확해야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폐쇄적인 사람일지라도 모든 인연을 밀어내는 사람은 없다. 그랬다면, 주변에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다. 관계의 실패를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들은 평생 발전이 있을 수 없다.




[5] 마음껏 떠들고 싶다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도 우울증이 찾아온다. 가벼운 수다가 아닌, 속마음을 진솔하게 내뱉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참담함을 머금고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게'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것은 필요 없다.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서 야속하게도 나를 위하는 사람보다 알아주는 사람을 떠올린다. 나의 고통을 진심으로 알아주고 같은 고통을 겪었던 그런 사람이 주변에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걷기를 포기하고 싶어 진다.




[원 플러스 원]

[1] 내 편이라는 동질감은 쉽게 생기고 어렵지 않게 사라진다. 그 동질감은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끼리의 유대감으로 인해 생성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실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면 동질감이라는 것은 쉽게 파기된다. 서로 굳게 믿고 따랐던 우정과 의미들이 산산조각 나 길바닥에 흩뿌려진다. 이제는 서로에게 동질감은 찾아볼 수 없다. 동질감은 결국 기분이다. 기분에 따라 호의적인 상대에게도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적대적인 상대에게 조차 동질감을 찾아낼 수도 있다.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외롭고 힘들다는 이야기다. 누군가 동질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한 번쯤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봐도 좋다.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말이다.




[2] 폭우가 쏟아지는 초여름 우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매일 걷던 산책길에서 두 번이나 넘어질 뻔했고, 슬리퍼를 신은 내 발은 생채기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엄지발가락이 크게 찢어졌다. 발가락의 통증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귀 끝 어딘가에 다다랐지만, 내 표정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한 통증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통증은 통증으로 잊는다. 실재하는 말이었다.


폭우에 숨어 눈물을 뱉어냈다. 흘렸다에서 그칠 수준이 아니라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뱉어냈다. 온몸에 있는 수분을 다 말리기라도 할 작정으로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산책 시간을 깊은 밤으로 정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낼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개운하게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집은 존재만으로도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