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
[1] 인생의 고비들을 생각한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은 생각으로도 마주하기 불편하다. 몇 번 넘었던 고비들을 다시금 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쾌하고, 불편한 일이다. 그런 불쾌한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의 나는 '피곤하고, 지친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예의 그렇듯, 우울한 심경을 신체의 이상이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감기는 좀처럼 낫지 못한다. 너덜 해진 몸과 마음은 더 이상 고비를 원하지 않는다. 시련을 버텨내기 어렵다. 그렇게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기보다 벗어나길 희망한다. 그래도 살아내긴 해야 하니까. 글을 쓰며 버텨본다.
[2] 행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니 오히려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유 모를 우울증이라고 치부하고 넘겼다. '과거와 비슷하게 가만히 두면 넘어가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시간을 죽였다. 그런데 증상은 점점 악화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냉혈한 같다는 말과, 기계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만큼 인정머리 없고 눈물도 없어 보였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 같은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진다. 남들 앞에서 절대 울지 못하는 것뿐이지, 눈물이 없는 게 아니다.
이렇듯 타인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수록 좋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그들과의 친밀한 시간'이다. 최소 1년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습관과 습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다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그렇게 까지 해야만 그들의 진심을 조금은 알 수 있다. 겉핥기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마음대로 품평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저열한 행위는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간다.
[3] 사람은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무분별한 짜증 섞인 고함이 아닌, 타당한 외침이 되어야 한다. 화도 잘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잘 내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는 타당한 외침이라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호소하지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저 무분별한 고함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만 깎아먹게 된다.
심지어 그 외침이 타당한지도 의문이다. 아무리 화를 잘 못 낸다고 하여도 이유가 빼도 박도 못하는 참이라면 소수일 지라도 동의하는 사람이 없을 수가 없다. 불편한 진실에 침묵할 수도 있지만 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감을 내비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화를 내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대화가 결렬되었을 때는 무시를 하는 게 답이고, 무시를 해도 그들의 비난이 멈추지 않는다면, 확실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면,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도 저도 어려울 때 마지막의 마지막에 화를 내는데, 그 화를 아주아주 잘 내야 한다. 내 모습도 깎아먹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4] 끔찍한 상처를 벗어나며 나는 무엇을 지키고자 했을까.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나 자신'이었다. 고통에 갇힌 나를 지키고자 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이 긍정적으로 다가와 나를 변화시켰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해야지 했던 일들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없던 꿈도 생기고 생각하지 않았던 미래를 상상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연한 불안함이 조금은 옅어지며 행복의 발판을 싼 가격에 마련할 수 있었다.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나를 잘 지키며 살아낼 생각이다.
[5] 나는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도 막막한 무엇인가가 발목을 강하게 잡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읽고 쓰는 행위에 불만은 없으나, 내가 진정 쓰고 싶은 이야기는 '소설'이다. 창작을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에 남들이 쓴 창작을 읽어내고 더해서 에세이만 주야장천 쓰고 있다.
사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안다. 소설을 쓰면 된다. 창작을 하면 된다. 글쓰기의 모든 문제는 읽고 쓰다 보면 해결된다. 결국 내 글쓰기는 쓰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런데 아직은 쓰고 싶지 않다. 스스로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한다. 쓰고 싶은 마음과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에세이를 쓰면서 구력을 키우자고 마음먹었다. 에세이가 문학의 하위 호환은 아니지만, 진입장벽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소설을 쓰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몇 시간 동안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날이 수개월이 넘은 적도 있다. 자괴감이 내 머리채를 잡고 '너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며 자존감마저 앗아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며 쓰는 에세이는 달랐다. 산발적인 에세이로 이마저도 완성도가 대단히 낮지만, 쓴다는 행위에 멈춤이 없다. 술술 써지는 글을 보고 있자면 매번 허탈한 웃음이 방 안의 적막을 밀어냈다.
[네 캔에 만 원]
[1] 부모님의 몸이 가벼워질수록 자식들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이유는 부모님이 짊어졌던 가장의 무게를 자식들이 서서히 이어받기 때문이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아낌없고 하염없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안겨주었던 부모님에게 우리는 일부분만을 돌려준다. '내 것' 없이 자식들에게 모두 바친 부모님들과는 많이 다르게 우리들은 내 것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부모님에게 받은 모든 것은 버려둔 채 '성인은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하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개소리들을 싸지르며 효도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친다.
우리 집은 어려울수록 갈비를 먹었고, 힘들수록 화목했다. 세상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것은 가족의 울타리였고, 어릴 적 난간에 걸쳐진 다리를 내려준 것 또한 가족의 힘이었다. 이제는 내가 가족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차례다.
독립을 하는 것과 도망치는 것은 다르다. 책임지는 것과 얹혀사는 것 또한 다르다. 세상사 각기 다르고, 타인의 인생사는 아무도 모른다. 어림짐작이 얼마나 멍청하고 안일한 행동인지 이제는 알 필요가 있다. 독립을 하지 않는 것과 못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독립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흰소리를 했다면 충분한 반성이 이루어져야 마땅하지만, 당사자는 생각지도 못할 테다. 그렇게 멍청한 업보만 늘어갈지도 모른다. 독립한 사람들 모두가 효도로부터 도망치고 회피한 게 아니듯, 독립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미숙하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폐기 상품이지만 아직 괜찮아]
[1] 과거에 빠져 그 영광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추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는 것과는 다르다. 이제는 없는 영광을 품에 안고서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고 한들 그게 전진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후퇴일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 독하게 먹고 과거의 의미 없는 영광을 뱉어내고, 걸러내려야 한다.
그땐 좋았지 라고 생각하는 시절, 그것이 추억인지 과거의 의미 없는 영광인지를 스스로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를 골라내 버릴 수 있다면 버리는 게 바람직하다. 과거와 물건은 깊은 연관이 있는데, 그 연관된 물건들을 하나, 둘 버리다 보면 의미 없는 과거의 상념들이 줄지어 사라질 테다. 물건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기관장치가 분명 있다. 어떤 기관을 건드려서 과거가 떠올랐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관장치들을 모두 해제하거나, 부숴버려야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테다.
이제는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영광을 버리고, 현재의 나로 살아야 할 때이다.
[2] 읽기 싫고, 쓰기 힘들 때 산책을 한다. 밤 산책을 하며 하염없이 걸을 때면 온갖 상념들이 점철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렇게 이야기들에 매료되어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얼마나 더 걸을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서서히 세상 속 어딘가로 빠져들어간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마침표가 찍힐 때쯤 글이 쓰고 싶어 진다. 글쓰기는 항상 선순환의 굴레만을 선사한다. 글쓰기가 독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3] 상황이 벌어진 후에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춘다. 뒤늦은 후회는 인간의 미덕이니까 말이다. 당연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는 노력은 끊임이 없다. 또 당연하게도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무려 여러 번이나 말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나는 안될 놈이다 자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은 짧아 아깝고, 그 감정에 소모되어 닳아 없어질 내가 안타깝다.
[4] 상스러운 말 없이, 폭력적인 말 없이도 상대를 윽박지를 수 있다. 언성도 높이지 않고, 욕설을 섞지 않아도 누군가는 바짝 움츠러든다. 심지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들의 목을 조를 수도 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가 있다. 그렇게 내 울타리 안에 있는 그들 모두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5] 살을 에는 추위 속에 핫팩보다 뜨겁고 따뜻한 게 있다. 바로 사람의 손이다. 온풍기는 살갗을 바싹 마르게 하는 따뜻함을 선사하지만 사람의 온기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아늑하게 만든다. 어떤 역경과 고난 그리고 추위도 이겨낼 수 있도록 후끈 달아오른다. 사람은 겨울에 성장하고, 추운 날씨에 더욱더 따뜻해진다. 모쪼록 사람은 따뜻한 게 최고다.
[6] 차가운 겨울 공기는 그 어떤 각성제보다 훨씬 낫다. 간에 부담도 주지 않는데 정신은 말똥 해진다. 차가운 공기의 냄새는 그 어떤 향수보다 좋은 냄새가 난다. 심지어 기분까지 좋아진다. 오늘 하루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왠지 모르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확신이 심어진다. 그렇게 오늘을 기분 좋게 살아낸다.
[ALWAYS]
[1] 기억이라는 게 참으로도 고통스럽다. 떠올리고 싶지 않고, 지우고 싶어도 절대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항상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슴 찢어지는 기억일지라도 망각으로 인해 부분 부분 미화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추억이 만들어지고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된다. 어쩌면 그 기억 때문에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소통의 부재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서로 말을 나눈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게 아니듯, 옆에 있다고 해서 단절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말을 받아주는 이가 주변에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떠나간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고 수긍하는 게 아니라 힘겹게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부재는 결국 행복의 부재로 다가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고 우리는 항상 늦음을 반복한다.
[3] 내 무심함과 오만함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생각을 끄집어내 내 주변 어디에든 위치시킨다. 가끔은 그게 너무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워 눈물이 뚝뚝 흐를 때도 있다. 내가 모든 것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대했던 것이 사라지자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한 가지를 가지고 모든 것을 가졌다 자부한 나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내쳤다. 필요 없는 지인이라 생각했다. 쓰레기를 버리듯 치워버렸다.
그렇게 공허해진 나는 비로소 명확해졌다. 회복의 씨앗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씨앗을 싹 틔우려면 힘을 내야 했다.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이내 주변도 두리번거렸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냥 나를 알고 나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행복하게 살지 않을 이유가 없어졌다.
[4] 악당들에게는 미소를 지어주자. 누군가를 험담하고, 멸시하고 어림짐작으로 한 사람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악당들에게 성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들이 원하는 게 바로 우리들의 고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대로 해야 한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이내 함박웃음을 들려줘야 한다. 악당들은, 아니 악마들은 사람의 행복에 겨운 웃음을 혐오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붙은 괴물들을 떨쳐내야 한다.
[5] 아무리 절망적인 비극이 찾아와도 나는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자조하며 망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예전의 꿈도 희망도 없는 나였다면 그 비극에 매몰되어 이내 쓰레기장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꿈이 생겼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는 내가 자랑스럽다. 그 꿈의 일부분을 실현시켰고 그런 상황이 신기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 어떤 비극이 다시 내 발목을 잡는다고 해도 버텨낼 힘이 있다. 작은 생채기쯤은 쉽게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6] 인생이 거듭됨에 따라 내게 상처 받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간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타인들에게 상처를 안긴다. 그들의 생채기를 보며 즐거워하는 사이코패스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성격은 고칠 수 없는 것인가. 이 오만함은 어떻게 해야 사라질까. 스스로를 중산간 지역의 고립된 곳으로 가두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까. 모르겠다.
관계에 지친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사람과의 관계를 놓지 못한다. 누군가와의 연결됨은 나를 살아있게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더 악독한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과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기에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깊은 산속에 혼자만의 시간을 평생 영위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렇게 나무에 둘러 쌓여 모든 위험으로부터 회피하고 싶다. 성인군자가 나를 감싸주긴 힘들 테니, 깊은 숲 속에 숨어 나무들이 내 방패가 되어주겠지 하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7] 세상이 요구하는 어떤 기준에 맞춰 사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요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삿대질하는 것은 좋지 않다. 본인과 다르다고 힐난하고, 헐뜯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행동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라면 매 순간 짐승이 되어가는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그 통제를 멈춘다면 이내 짐승으로 변모한 자신을 볼 수 있을 테다.
[8] 불편한 세상을 계속 살아보려고 한다. 간혹 멈추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힘내 살아내야겠다 다짐했다. 모든 게 엉망인 것 같고, 모두 포기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살아낸다. 살아낼 수 없을 만큼의 공포가 밀려와도 이겨내고 살아낸다. 살아낸다는 생각 자체가 망가져 난간 위에 두 다리가 걸쳐져 있어도 결국엔 살아낸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있는 게 좋다지 않은가. 그러니까, 운명이 허락할 때까지 살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