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볼 용기
멀리서 보면 불우한 유년을 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쁜 부모님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었고, 비교적 관리가 되지 않은 아이는 티가 나기 때문이다. 사소하게 양말부터, 위생까지 말이다. 물론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고,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서 바빠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지금도 나는 불우한 유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 불편하고, 특별했을 뿐이다.
초등학교 급식을 먹기 위해서는 수저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당연히 매일 닦아서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신머리 없는 나는 가방에서 수저를 꺼내 두지 않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어머니는 그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어제 사용한 수저를 가지고 그대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늘 아차 하며 복도의 세면대로 뛰어가 비누로 닦곤 했다. 그것을 본 몇몇 아이들은 나를 더러워했다. 그렇게 나는 은은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 케이크가 배달 왔다. 같은 반 아이의 생일이었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케이크를 준비한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수저를 확인했고, 이번에는 깨끗하게 세척되어 있었다. 안도한 나는 숟가락을 들어 케이크를 퍼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여자아이가 큰소리로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얘 더러워서 같이 먹기 싫어요!” 그 아이는 왠지 모르게 악의가 가득 차 있었다. 아직도 경멸에 찬 그 표정이, 악의가 가득한 그 눈빛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날 이후로 스스로 위생에 신경 썼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와 수저를 직접 닦았고, 하루에도 속옷을 여러 번 갈아입었다. 누구도 나에게 더럽다고 할 수 없도록 말이다.
11살의 나는 당시 담임선생에게 학대받고 있었다. 급식을 더 먹고 싶다고 말하면 “네가 뭘 잘했다고 더 먹어!”라며 핀잔을 주고, 볼에 상처가 남게 꼬집기 일쑤였다. 선생님 학급 내에서 검사부와 청소부 등 여러 행정 부서를 만들었다. 당시 촌지를 잘 주었던 아이들은 매번 검사부에 발탁되었다. 그 수준이 낮거나 나처럼 촌지를 조금도 주지 않은 아이들은 항상 청소부를 전전했다. 끊임없는 차별과 학대에 신물 나 학교를 가지 않게 되었다. 아침 일찍 등교한다는 말과 함께 나는 동네를 방황했다. 당시 유행했던 장난감 권총도 가지고 나왔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BB탄 총알을 주워 주머니에 한가득 담아두었다. 이후 집 근처 빌라 화단으로 가서 빈 깡통을 올려두고 총을 조준하고 발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면 남의 집 우유 주머니를 뒤져 훔쳐 마시고, 피로하면 빌라 뒷마당 길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5일이 흘렀다. 금요일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을 나섰다. 지난번과 다름없이 길바닥에 있는 BB탄 총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고, 깡통을 맞추며 놀다 정오쯤에 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나는 비몽사몽에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 따뜻한 냄새에 눈을 떠보니 옆에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이 선명하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슬픔, 애잔함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으나,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집에서 쉬고 있어, 엄마가 치킨 사 올게.” 그렇게 한참 후 누나와 함께 돌아온 어머니 손에는 치킨 봉투가 걸려 있었다.
5일이 지났음에도, 선생은 우리 집에 전화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본인 반 아이가 무단결석을 5일 이상 하고 있다면 해당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하는 게 기본이다. 그럼에도 그 선생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0대의 젊은 여선생은 촌지만을 바라는 역겨운 선생이었다. 어머니가 치킨을 사 온 그날 이후, 우리 반에 있던 검사부와 청소부는 사라졌다. 그리고 선생의 차별과 학대도 말끔하게 없어졌다. 나는 아직도 그 상처를 담고 있지만, 어머니의 적절한 대처에 덧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