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되는 글

소설가

by 박진권

폐기되는


글 쓰는 사람이 꿈인 사람도 그 계통의 하위 꿈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시인이나 소설가 같은 것 말이다. 죽기 전까지 유지하고 싶은 꿈은 어떤 글이든 쓰는 것이다. 산문, 비평, 소설, 시 모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의 정체성은 역시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물론, 소설보다는 산문이나 서평 같은 비평을 훨씬 많이 쓰지만 말이다. 이제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모든 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도파민에 중독된 뇌는 더 빠른 성취를 원한다. 글은, 글로는 그게 참 어렵다. 언제, 어떻게, 왜 떠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박진권




소설가

산문은 하루에 일천 자에서 이천 자씩 잘도 써진다.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하루에 일만 자를 작성해도 몇 달 동안 일만 자에서 머무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만 자를 작성한 글이 몇 년간 진전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계속 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소설 쓰는 손을 놓아버린다. 그것을 대체한 게 지금 이 글, 철학 에세이다. 나의 허상 낙원, 이것으로는 소설가의 꿈도 이룰 수 없고, 능력도 상승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는 쾌락이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마약이기도 하다. 사태 파악이 어려운 철부지와 같은 판단력에 놓을 수가 없다.


의미는 부여하면 그만이다. 글 쓰는 근육을 길러주고, 뭐라도 써야 소설도 쓸 수 있다. 대부분은 긍정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방관적인 시야로 관조하는 게 태반이다. 그럼에도 바늘구멍처럼 좁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비관과 비약은 내 글 쓰는 손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서재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스무 번 중 한 번은,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린가’하는 생각이 기어 올라온다. 그럴 때면 손가락의 감각이 이상해지고,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내 손이 아닌 것처럼 타자 치는 손가락이 어색해진다. 대안은 있지만 실행은 어렵다. 산문을 적당히 쓰거나 놓고, 소설을 쓰면 된다.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오늘도 소설을 쓰려다가 다시금 산문을 작성한다. 어쨌거나 언젠가 올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이거라도 써야겠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나 사회에서 불합리한 일이 이야기되거나, 문학 작품에서 그런 것이 쓰이고 잘 수용되어 반박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문제는 나중에 점차 재검토되고 조명되고 숙고 되고 고려되고 논의되어 결국 올바른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의 어려움을 해결할 만큼의 적당한 시일이 지나면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가 즉각 파악한 것을 거의 모든 사람이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해야 한다. 물론 그동안은 참고 견뎌야 한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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