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위염
살면서 소화불량이라는 단어를 꺼내본 적이 없었다. 늘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친구나, 동생을 볼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갑작스레 찾아온 거북함에 겁이 났다. 원래 아프다고 바로 병원에 가지 않고 약국에서 간단히 약 타 먹는 게 다였는데, 이 조바심은, 나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사실 내시경이나 정확한 검사를 해보기 전까지는 현대인이라면 달고 있는 역류성 식도염이거나, 위염이거나 하는 간단한 처방으로 끝난다. 심지어, 처음 병원에 갔을 때는 그냥 일시적인 거니, 따로 음식 조심할 필욘 없고, 약만 먹어보자고 했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복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속이 더부룩했고, 트림을 수시로 했다. 그 덕에 몇 주째 못 먹은 커피가 가장 야속했다. 갑자기 찾아온 복통 때문에, 회사 조퇴까지 하게 됐다.
나중엔 큰 병원에서 피검사, 초음파 검사까지 했는데, 이렇다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한 양배추즙, 마 등 몸에 좋다는 걸 챙겨 먹다 보니 나아졌다. 약 덕분에 좋아진 건지, 식습관 덕에 좋아진 건지, 원인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답답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발자인 내가 문제를 해결할 때는 반드시 원인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기존에 없었던 문제가 생겼다면 삭제했거나, 수정 또는 추가한 코드에 의해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니, 그 부분을 보면 된다. 그렇다면 몸은? 몸은 너무 다양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하나가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일 수 있다. 전날 먹은 음식 중에 내 몸에 맞지 않은 것이 있었거나, 취침시간이 줄어들어서 이거나, 이 모든 걸 다 기록하고 관찰하지 않는 한, 원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더불어, 개발에 문제가 생기면, 여러 가지 요소를 통제하면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는 차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찾는 것과 같다. 이러나저러나, 원인을 찾기 힘들겠다 라는 생각이 들고나자, 그냥 개선할 수 있는 점을 고민하게 됐다. 양배추를 먹거나, 마를 먹거나.
그리고 위염을 겪고 나니 역시 사람은, 내가 겪지 않은 고통에 대해 얼마나 둔감했는지 느꼈다. 만성적으로 위가 약한 동생은, 조금 많이 먹거나, 먹기 싫은 음식을 먹으면 바로 구토를 했다. 그리고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나는, 그냥 조금씩 먹어라는 말 뒤에 숨어, 걱정하는 척을 했었다. 막상 겪어보니, 겪어보지도 못한 걸 쉽게 말했던 게 미안해졌다.
위염 하나로도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도는 거 보니, 나는 N 이 맞나 보다.
졸업식
드디어 졸업식을 했다. 대학교 졸업식 땐,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학위복을 입고 학사모를 던지는 퍼포먼스도 하지 못했었는데. 아마 나는 이 날을 위해, 휴학 포함 2년 반을 견뎠는지도 모르겠다. 더운 날씨에 땀으로 온몸이 젖으면서도 좋았다. 몇 번 오진 않았지만, 풍경 좋은 학교도 좋았고. 특색 있는 학위복도 좋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축하해주신 많은 분이 있어서 좋았다. 부족한 학교 생활이었지만, 많은 분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할 수 있어 행복했다. 더운 여름날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포토존을 누비던 고마운 분들이 생각난다. 이렇게 짧고도 길었던 나의 MBA 생활이 끝났다. 처음 시작할 때의 원했던 목표를 달성했나? 생각하면 그렇진 못했다. 코로나가 핑계일 수도, 술이 핑계일 수도 있으나, 아쉬웠다. 그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닌 경험은, 아마 앞으로 내가 뭘 하든,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게 하는 것도 내 몫일 테니까.
미루는 것에 대하여
나는 미루지 않는 성격이다. 과제가 있으면, 기한보다 훨씬 먼저 끝내서 제출하는 편이고, 시간에 쫓기는 법이 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기한이 올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막판에 처리한 일이 꽤나 많았다. 지금 쓰는 회고가 그랬고, 회사에서 여는 세미나 발표 준비를 할 때가 그랬다. 시간이 임박해서 일을 처리할 때는 장점이 있다. 바로 일의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점. 짧은 시간 안에 기한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일을 끝내야 하므로, 같은 시간이라도 더 빠르게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 단점은, 내가 미루는 걸 싫어하는 이유에 있다. 나는 정해진 일이 있으면 해치워야 마음이 편해진다. 계속 미루다 보면, 불편한 마음으로 한참을 지내게 되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의 효율보다는, 내 마음을 쓰지 않기 위해 빨리 처리해놓는 편이다. 잘 미루지 않지만 오히려 미루어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이런 장단점까지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역시나 벼락치기는 내 성향에 맞지 않다.
아, 그리고 하나. 연락하는 걸 정말 미룬다. 예전에 조선소에서 일할 때도 가장 힘든 게 전화하기였다. 차라리 얼굴 보고 말하는 거는 어렵지 않았는데, 전화는 정말 하기가 싫었다. 일이야 해야 하고, 전화 말고도 다른 수단이 있어 질질 끄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런데 멘토분께 연락을 드리거나, 명절이라 은사님께 전화드리는 건 몇 주 전부터 언제, 어떻게 연락을 드려야 할지 스케줄까지 짜 놓을 정도로 나에게 어려운 일이다. 요새는 전화보다는 카톡, 메일 등 다양한 연락 수단이 있다 보니, 더더욱 전화할 일이 없다. 음식 배달을 위해 전화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하나의 예가 아닐까. 어쨌든 전화는 어렵다. 내가 한없이 미루게 되는 일이다.
이렇게 조금 게으르고, 바빴던 8월이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