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씨의 수업 일기 (5) - 황순원에 대하여
김지씨는 오늘도 방과후 수업에 허덕인다. '요즘 누가 방학 때 방과후 수업을 하냐'라는 반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김지씨가 다니는 학교는 학생들이 방학 중에 기숙사에 있기도 하고, 수시든 정시든 대학 입시에 민감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가 있다보니 시대에 맞지 않는 방과후 수업이 개설되고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김지씨의 수업이 그 옛날 칠판을 가득 메운 필기와 함께 진행되는 그 미친 강의식 방과후 수업은 아니다. 그런 수업은 이미 1.5배속으로 수강 가능한 일타 강사들의 인강이 멋들어지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김지씨는 뭐라도 독특한 수업을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순식간에 밀리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런데 방과후 수업과 관련해서 김지씨는 사실 좀 억울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김지씨도 방학에는 집에서 쉬고 싶은 사람 중 하나기 때문이다. 뭐 밀린 대출금이야 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꾸역꾸역 방과후 수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만큼 궁색한 처지도 아니고, 집에 있으면 눈치가 보여서 학교에 나와 있는 것이 편한 소위 '새는 바가지'도 아니기 때문에, 김지씨는 방과후 수업을 이제는 좀 안하고 싶다. 그러나 학생, 학부형의 의견을 적극 수렴한 학교의 처지 - 정확히 말하면 윗분들의 처지 - 도 있고 해서, 이른바 주요 과목이라고 하는 국어 과목의 방과후 수업을 어떻게든 개설하는 편이다.
물론 물정 모르는 어떤 사람들은 김지씨를 방과후에 목을 메는, 아주 돈독 오른 사람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누가 방과후 수업을 하고 싶겠는가. 해야 하니 하는 거고, 만약 해야 한다면 차라리 제대로 하는 게 낫겠다 싶어 김지씨는 방과후 수업을 새로 구성할 때 점점 나빠지는 머리를 있는 힘껏 짜내는 것이다. 그 결과 이번 방학에도 김지씨는 세 종류의 수업을 허덕허덕 짜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작가로 살펴보는 현대소설', 두 번째는 '영화로 준비하는 면접/논술', 세 번째는 '문학과 예술로 찾아가는 세계 다크 투어리즘'이 각 수업의 주제이다.
김지씨는 이번에 세 번째 수업을 꽤 공들여 준비해 보았는데, 그래봤자 김지씨가 하는 게 거기서 거기라고, 김지씨의 집에 있는 책들 중에서 세계 각국의 비참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을 골라 한 보따리 싸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학생들이 각자 읽은 뒤에 토론 및 발표를 진행하는 수업이다. 사실 김지씨도 이 수업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지 잘 몰라서 기대반 걱정반의 심정이다. 이런 걸 보면 김지씨는 참 뻔뻔한 교사다. 워낙 계획성이 없는 P형 인간이다보니 자기가 수업을 하면서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대책없는 교사면서, 이런 상황을 '열린 수업'이라고 철판 깔고 변명할 수 있는 선생이니.
물론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세 번째 수업 이야기는 아니고, 어떻게 보면 클래식한 수업인 첫 번째 작가론 수업이다. 말이 거창하게 작가론 수업이지, 실제로는 수능 혹은 모의고사나 수능 특강 등에 이미 발췌되어 출제된 작가의 작품들을 온전히 읽고 그 작가에 대한 썰을 조금 풀어주는 수업이다. 그냥 인터넷 검색하면 요즘은 작가에 대해 잘 나오니까 그걸로 때워도 되지만, 그렇기에는 학생들의 검색 능력이 더 뛰어난 편이라, 김지씨는 더 깊이 있는 자료를 찾고 읽어보면서 이야기할 내용들을 마련한다. 예를 들어 최근 박사 논문 같은 것은 학생들이 찾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박사 논문의 연구사 정리 혹은 요약본을 잘 살피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들이 조금씩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수업 준비를 할 때 김지씨가 따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분이 있다. 그분은 바로 '김윤식 선생'인데, 옛날 대학원 시험을 준비할 때 한국 문학사에 대한 감이 너무 없어서 김윤식 선생의 작가론 시리즈를 걍 대놓고 다 읽어버렸던 것이 지금도 깨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동인 연구>, <임화 연구>, <염상섭 연구>, <김동리와 그의 시대>, <이상 소설 연구> 등등을 재미나게 읽었는데 김지씨에게는 그런 독서 경험들이 한국 문학사라는 광활한 바다에서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세밀한 지도 역할을 한 셈이다. 이 책들의 장점은 작가 한 사람에 관련된 엄청난 자료를 찾아 꼼꼼히 읽어낸 뒤, 작가를 하나의 텍스트로 보고 작가론을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책을 써낼 수 있는 바탕에는 김윤식 선생의 엄청난 공부가 있었다는 것을 김지씨는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곤 했다.
김윤식 선생의 공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김지씨가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였던 임종국 선생과의 일화다. 일제강점기 문헌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고려대 도서관 폐가실 - 옛날에 김지씨도 거기 꽤 들어가본 일이 있는데 거기 진짜 답답했었다 - 에 임선생이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문헌을 뒤지고 있을 때, 1년 내내 매일같이 만난 대학원생이 김윤식 선생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처박혀서 일제강점기 문학 자료들을 읽고, 심지어는 에스페란토어까지 공부하면서 문학사 정리를 했으니 선생의 공부에 경의를 표할 따름이다.
물론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몇 가지 단점도 있기는 하다. 똑같은 이야기가 약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과 선생의 작가론이 가끔은 지나치게 재구성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물론 이 단점을 덮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세상 물정 몰랐던 김지씨에게는 문학의 넓이와 깊이를 알려준 소중한 책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지씨는 과거의 추억과 함께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오늘 수업에서 김지씨는 황순원 작가를 다뤄 보았다. 김윤식 선생은 <김동리와 그의 시대>라는 책을 통해 황순원, 김동리, 서정주와 같은 작가들이 그전 세대들 예를 들어 이태준, 김남천, 박태원, 정지용과 같은 작가들을 부정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자 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김지씨는 기억했다. 그런 문학사의 복잡한 맥락이야 학생들에게 다 설명하기 힘들겠지만, 아무튼 황순원이라는 작가는 꼭 한 번 다뤄야 겠다고 생각해서 김지씨는 수업에 황순원 작가를 초빙했다.
학생들은 우선 한국 전쟁 시기를 다룬 비교적 짧은 소설인 <학>과 <너와 나만의 시간>을 읽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국민소설 <소나기>의 아우라로 인해 황순원 작가에 대한 낭만주의적 오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김지씨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요즘 학생들에게 <소나기>는 더이상 국민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대충 알고는 있지만 그 소설이 그렇게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았을 때, 문학교육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독서폭이 좁아진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전(正典)'이 사라진 시대라는 것을 김지씨는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김지씨는 황순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황순원 연구> (오생근 역, 문학과지성사, 1993)라는 책을 많이 참고하였다. <소나기>와 <별>의 낭만적인 세계만을 그리는 작가가 아니며, <카인의 후예>나 <별과 같이 살다>와 같은 작품을 통해 시대적 문제를 직시하고 있는 작가임을 김지씨는 강조하고자 했다. 김지씨가 참고한 글에서 평론가 김병익은 황순원이 시대와 함께하는 작가이면서도 순수 문학의 기수처럼 평가받은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한국 산문 문체의 모범으로 정평이 나 있는 서정성과 절제로 충만한 문장미(文章美)
2) 세심하면서도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는 묘사
3) 작가의 관심이 사건이나 상황 자체보다 그 속에 놓여 있는 인간 자체에 있다는 점
4) 등장인물들이 어떤 타입이든 선의를 지니고 있고 내적 갈등을 크게 보여주지 않는 단선적 인간형
(김병익,「순수 문학과 그 역사성」, 『황순원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3. p.28의 내용을 요약)
이러한 해석에 김지씨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고, '순수 대 참여'라는 일종의 가짜 논쟁의 틈바구니에서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손해본 작가가 황순원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 학생들과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 생각은 더 강해졌는데, 1953년이라는 살벌한 시기에 농민부위원장까지 한 빨갱이를 그냥 친구라는 이유로 풀어주는 <학>의 장면도 그렇고, 1958년에 창작된 <너와 나만의 시간>에서 우방국 미군의 만행을 그대로 서술하는 장면 - 물론 이 장면은 수업 시간에 주로 다루지 않는다 - 도 보통의 용기가 아니라면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김지씨의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했던 것은 황순원 작가는 어떻게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 시기에 이런 작품들을 써낼 수 있었냐는 것이다. 물론 황순원 연구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김지씨는 이 질문의 답으로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바로 요즘 말로 '까방권'. 황순원 작가는 그 살벌한 시기에도 다른 사람들이 쉽게 깔 수 없는 '까임방지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까방권'은 한 개가 아니라 심지어 여러 개였다.
첫 번째 까방권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이던 1934년 첫시집을 동경에서 출판했다가, 총독부 검열을 피하기 위해 꼼수를 쓴 것 아니냐며 평양 경찰서에 29일간 구류를 당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앞장 선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작가의 생각과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물론 아버지 또한 3.1 운동 때 이승훈 선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감옥살이를 한 집안이었다고 하니 그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다.
두 번째 까방권은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에 작가의 창작 활동에서 획득한다. 한국어 창작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그 엄혹한 시기에 황순원 작가는 광복을 믿고, 한국어로 작품을 써서 파묻어 두었다고 한다. 그때 <독짓는 늙은이>, <황노인>과 같은 대표작들이 창작되었다고 한다. 이태준, 채만식 등이 낙향해서 숨어 있거나, 친일 활동에 참여했던 것과 달리 그는 한국어의 부활을 믿고 신념 어린 창작을 했으니 해방 이후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세 번째 까방권은 이념 대립의 치열했던 시기 남한에서 황순원 작가는 월남 작가였다는 점이다. <카인의 후예>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공산당에게 핍박받다가 1946년에 38선을 넘어 내려온 월남 작가에게 누가 함부로 빨갱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문제에 비교적 자유롭게 언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씨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방과후 수업에서 여섯 명 남짓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무슨 꼬꼬무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떠들어댔다. 물론 황순원 작가의 작품을 좀 더 읽고 깊이 탐구한다면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한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핑계로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김지씨도 다시 황순원이라는 친근하지만 잘 모르는 작가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학생들은 황순원이라는 친근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작가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된 기회가 된 듯하였다. 뭐 김지씨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대만족이라고 자평하면서 황순원 작가에 대한 수박 겉핥기 수업을 나름 보람있게 마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