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해파리와 할머니 세포

- 잘 배우려면 잘 자야 해

by 우물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님 말씀이지만, 잠을 잘 자는 일이 더 먼저다. 잠을 못 자면,

잘 배울 수 없으니 말이다. 코로나 후유증? 아니면 나이 탓인지 수시로 쪽잠이라도 자줘야 머릿속

안개가 걷히는 걸 확실히 느낀다. 수면을 취하는 사이에 고맙게도 뇌척수액이 머릿속 혈관을 타고

돌며 뇌세포 사이 노폐물을 씻어 준다니, 이건 외출 후 손발을 씻는 거랑 마찬가지다.

머리를 밀어 넣고 낮잠에 빠진 카나리아

서울 카나리아가 부산 사투리를 배우는 동안

대뇌 피질 일곱 군데에 신경회로의 연결이

늘어난 것도 숙면 동안으로 여겨진다. 탄광에

들어갈 때 유독가스 감지용으로 사용했을 만큼

카나리아는 예민한 새로, 낮잠을 포함해 하루에

열 시간이 넘는 수면을 취한다. 밤에는 빛과

소음,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게 새장에 담요를

덮어서라도 컴컴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채, 코알라도 시에스타

해가 지고 광합성이 멈추는 밤에는 식물도

스스로를 복구하고 성장한다. 코알라는 하루

스무 시간 정도를 나무를 끌어안고 주무신다.

심지어 뇌가 없는 해파리와 말미잘도 마치

사람처럼 하루 여덟 시간 정도 잠을 잔다고

한다. 뇌가 생기기 전에도 잠은 있었단 얘기다.

해파리가 잠을 자?


좌우 대칭의 척추동물은 신경세포가 척추 안

중추로 몰리고, 그 끝에 더욱 쏠린 중앙처리

장치가 신경계 전체를 관장한다. 이게 특이한

거라, ‘뇌쏠림(cephalization) 진화’란 이름도

붙여졌다. 뇌쏠림의 극단적 사례는 바로 인간,

이렇게 커져버린 뇌 덕분에 우린 생각도 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능력도 생겨버렸다.


반면 유구한 역사 따위 아랑곳 않고 6억 년 전 대략 진화를 마친 방사형 모양새 해파리는 온몸에

신경계가 퍼져 있을 뿐, 뇌 같은 건 따로 없다. 물론 심장도 없고, 폐도 없다. 촉수 형태의 팔다리로

유유자적 떠다니는 이들의 둥그런 몸은 물속에서 마치 심장 박동처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데,

하루 24시간 주기로 밤 8시간은 활동이 느려진다. 낮에는 분당 37회, 밤에는 32회 정도로 말이다.

이들이 사는 수족관에 수면 호르몬으로 알려진 멜라토닌을 주입하니 수면 시간이 길어지고, 낮에도

종종 밤 시간처럼 활동이 뜸해지는 걸 확인한 연구자들은 이 또한 낮잠으로 간주한다. 햇빛이 과한

스페인 남부, 베트남 사람들도 한낮에는 한 시간가량 창문을 가리고 달콤한 시에스타에 빠진다.




신경계의 활동이 저하되는 수면, 이게 왜 규칙적으로 반복될까? 해파리와 말미잘 역시 이 수면

시간에 세포 및 DNA 손상을 회복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잠은, 그냥 좀 쉬는 생체리듬이

아니라 DNA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 세포와 신경을 지키는 본능인 거다. 인간 역시

수면 부족은 DNA의 손상, 노화 및 질병의 위험이 증가하는 원인이라니, 수면은 참으로 보약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A.I.보다는 훨씬 똑똑해져야 할 이 시대, 부디 충분한 수면을 누리고 더 잘 배울

수 있게, 나라 법을 바꿔서라도 수면 시간은 넉넉히 지켜주면 좋겠다.


공자님 말씀이 아니어도 배움은 참 즐거운 자극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고 가르치는

이의 탓이다. 아니면 잠이 부족하거나, 그렇지도 않다면 배워 즐거운 쪽으로 방향을 틀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임계점에 이를 만큼 자극의 질 혹은 양에 이르러야 체화, 즉 “내 몸의

일부가” 된다. 내 몸의 일부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교사, 그런 스승은 눈물 나게 고마운 분, 산이

올 리 없으니 내가 가야 하는데, 산을 내 앞으로 옮겨 손잡고 함께 오르시는 분이 아닌가! 내 몸의

일부가 된다는 건, 배움이 내 몸에 자리 잡는다, 새로운 데이터를 담은 신경회로들이 몸에 자리

잡는다는 뜻일 것이다.




한 때는 원자를 ‘당구공’ 혹은 ‘태양계’ 모형으로 설명했었다. 이런 이미지는, 어떤 특성을 이해하는

좋은 비유가 된다. 비슷한 은유로 ‘할머니 세포(grandma cell)’란 게 있었다. 한국어로도 출간된,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유래한 개념이었다. 주인공의 강박 원인을

없애려, 주치의 아카케비치 박사가 주인공의 두뇌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담긴 뇌세포를 찾아

제거 수술을 한 이후, 환자는 ‘어머니’란 개념은 있지만 자기 어머니 관련 연상은 다 잃어버린다.


과학철학자 레트빈(Jerome Lettvin, 1920~2011)은 1969년 특강에서, 소설 속 주치의는 자기

성공에 고무되어 ‘할머니 세포’ 연구에 몰두했을 거라는 농담을 했다.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실험이나 뭐 사고실험(thinking experiments)을 전개한 사례 같은 것도 보고된 바 없었다.

그런데도 아마 ‘할머니’가 주는 친숙한 울림 탓이었을까? 이 표현은 순식간에 퍼져 신경과학,

그리고 인지과학에서도 진지하고 중요한 개념으로 회자되었다.


어느 세미나에서 장미향수 뿌린 유럽 할머니와 청국장 냄새 한국 할머니가 어떻게 같은 뇌세포에

있겠냐고, 스위스 산골 겨울, 소쿠리 가득 빵부스러기 찍어 먹는 보글보글, 염소 치즈 퀴퀴한 퐁뒤

냄새와 비슷하다는 설명을 보탰던 기억이 있다. 이어서 장미향수와 청국장 냄새는 다시 해당 세포와

연결’해야 하지 않겠냐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이건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후각 세포의

연결까지 요청되니, 좀 복잡할 해법을 찾아 무슨 마피아 조직이라도 꾸린 듯 우리는 ‘연결주의자

connectionist’라 자처하며 킥킥거리곤다. 20년 넘게 이 분야에서 회자되던 할머니 세포

가설은 결국 과학사를 통틀어 그냥 좀 민망했던 에피소드로 치부되었다.

아는 얼굴에 바로 반응하는 측두극 (temporal pole)

그런데 새삼 이 개념을 다시 소환할 결과가

수집되었다. 십수 년 만에 다시 만나도, 특히

유명한 사람 얼굴은 일부만 봐도 우린 누군지

안다. 또 목소리만 듣고도 바로 누군지 안다.

하지만 뇌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면 이 능력이

사라져 곤란을 겪기도 한다. 2021년 원숭이

두뇌의 측두엽 앞쪽 끝, 시각 피질에 해당하는

측두극(temporal pole)에서 특정 얼굴을 보고

바로 기억과 ‘연결’시키는 자리가 확인되었다.

그러니까 소설가 로스가 명명한 할머니 세포는,

한 개의 할머니 뉴런이 아니라, 카나리아가

사투리를 배울 때 새로 ‘연결된’ 일련의

신경회로들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예상된다.


아무래도 ‘할머니’ 소리를 인지하는 신경회로는 아직 논외에 머물고 있으나, 카나리아의 사투리

습득은 충분한 시사점을 안겨주었다. 슈넬레 교수님 제자들은 사실 ‘할머니 세포’와 관련해,

청각 차원의 신경회로 연결에 대해 이미 다각도로 논의했었다. 서로 다른 언어, 즉 우리말로 할머니

혹은 영어로 grandma, 독일어로 Oma라는 음성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양식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뉴런의 ‘연결’ 회로처럼 구현하기 위해, A.I. 기계에 어떻게 입력할 것인가? 어느덧 딥러닝

(deep learning)이 된 기계학습 프로그래밍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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