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배우는 첫 심리학 수업
박완서 작가의 '엄마의 말뚝'은 학교에서 배울 때, 주로 6.25 전쟁이 남긴 민족사의 비극적인 체험, 분단이 남긴 한을 그리고 있다는 식으로 배우고는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가족 문제로 바라보면, 어머니와 아들의 미분화된 가족을 다룬 작품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정서적으로 분화되지 못한 가족은 어떤 문제를 지녔을까? 가족 치료 선구자인 머레이 보웬의 개념을 활용하여 '엄마의 말뚝'을 읽어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엄마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오직 자식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자식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억척어멈, 그것이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다.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여기는 어머니. 어째서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 걸까?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식은 커서 어머니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 머레이 보웬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처럼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밀접하게 연결된 가족을 ‘분화가 될 된 가족’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서 분화는 가족끼리 정서적으로 얼마나 독립되어 있느냐를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엄마는 자식들과 정서적으로 거의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지나친 기대를, 딸에게는 지나친 염려를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가족끼리 친밀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친밀한 것 자체가 나쁠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정도가 문제다. 가족끼리 지나치게 밀착되고 융합되어 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가족 안의 구성원들이 각자 자주성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보웬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서로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독립적이길 바라는 마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특히 가족 구성원들은 정서적으로 얽혀 있어서 상대에게 의지하려는 마음과, 가족과 독립해서 지내려는 두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 보웬은 이를 각각 연합성과 개별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연합성이란 다른 가족에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말하고, 개별성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추진하려는 힘을 의미한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두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이다. 이럴 때 인간은 한쪽에 치우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 보웬은 이런 상태를 ‘분화’되었다고 보았다. 가족이 잘 분화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이성에 균형을 갖춰 사고와 감정을 분리시킬 줄 알고, 위기나 불안에 대처하는 능력도 갖추게 된다. 반면에 연합성과 개별성, 이 두 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를 ‘미분화’라고 하는데, 이럴 경우 지극히 의존적으로 살아가거나, 그와 정반대로 가족과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자, 다시 한 번 소설 속의 엄마를 보자. 어떤 모습인가? 누가 봐도 분화가 덜 된 모습이다. 자식들의 삶을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개별성은 고사하고 자식들의 개별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엄마. 소설 속 가족은 오로지 서로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미분화된 가족에게는 어떤 문제가 놓여 있을까?
미분화된 가족의 가장 큰 문제는 가족 구성원이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 살아간다는 데에 있다. 미분화된 이들에게 가족은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다. 가족이 감정으로 얽혀 있으니 이들에게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감정을 인식할 틈이 없다. 엄마가 싫어하는 일은 ‘나’도 싫어하고, 엄마가 기쁜 일은 ‘나’도 기쁘다. 자식들에게 좋은 일은 엄마도 좋은 일이며, 그런 일은 엄마 스스로 좋아할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만약 자식에게 잘못된 일이라면 그건 엄마에게도 나쁜 일이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이처럼 미분화된 가족들은 모든 판단이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치우쳐 있다. 이들은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서로의 감정에 휩쓸린다. 개별성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은 주변상황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외부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좋고 나쁨만 있을 뿐, 옳고 그른 논리는 없다. 왜 나쁜지, 왜 좋은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엄마는 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삶보다 아들과 딸의 출세에 더 집착했을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의사보다 무당에게 찾아가 병을 낫게 하려던 시골 풍습에 대한 불안감이 자식들을 시골이 아니라 도시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미신적인 생각으로 또다시 가족을 잃을 수 없다는 불안이 가족 구성원의 분화를 막았던 것이다. 만성적인 불안, 그것이 분화를 가로막는다.
엄마는 유독 오빠에게 집착이 강했다. 오빠 역시 엄마와의 애착이 ‘나’에 비해 훨씬 더 강렬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의존했는데, 이와 같은 관계를 보웬은 모자공생관계라고 불렀다. 모자공생이란 본래 조현병을 앓는 자녀와 어머니가 서로를 둘이 아닌 하나의 자아로 여길 만큼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애착을 갖는 상태를 뜻한다. 본래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태어난 직후 엄마와 완전한 융합상태이자 공생상태로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차차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가는데, 모자공생 관계는 그렇지 않다. 정신적으로 앓는 아들을 혼자 두기에 엄마는 불안하고, 조현병을 앓는 아들은 엄마 없이 지내는 게 끔찍하리만큼 무섭다. 결국 서로에 대한 만성적인 불안이 모자공생관계를 만들어낸다.
정신병을 앓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모자 공생관계를 엿볼 수 있다. 자식을 위해 무작정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 어른이 되어서도 캥거루 새끼처럼 부모 품에 기대어 사는 이들은 모두 모자공생관계의 확대판이다. 이들의 문제, 그것은 자녀의 정신적 성장이 그대로 멈춘다는 데에 있다.
소설 속에서 오빠는 6.25가 터진 뒤, 극도의 신경증과 실어증을 앓았다. 물론 그 까닭은 생존에 대한 절박한 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북한 편에 섰다가, 또다시 남한 편에 서기를 반복했으니 그가 느낄 공포와 불안이 가히 짐작이 간다. 여하튼 오빠는 그 후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존한다. 만약 오빠가 가족에게서 더 분화되고 독립적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오빠는 성인으로서 자기 삶을 책임지고, 더 나아가 전쟁으로부터 가족의 안전을 지키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가족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홀로 빨치산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빠는 겉만 멀쩡했지 위기가 닥치니 불안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존했다. 이는 오빠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엄마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오빠의 불안은 사실 엄마가 자신의 불안을 오빠에게 투사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오빠는 일종의 희생양에 가까웠다. 이 소설에서 엄마의 지울 수 없는 기억은 남편이 손도 쓰지 못한 채 죽었다는 데에 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사무쳤을까? 그럼 그 원망을 누구한테 해야 할까?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댁 어른들? 혹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채 굿판에 이끌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남편? 엄마는 적어도 이 둘 중에 누군가를 원망해야 옳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전통사회에서 시댁에 맞설 수 없는 일이었고, 죽은 남편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의 내면에 팽팽한 긴장과 불안만 감돌 뿐.
긴장과 불안을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할까? 보웬은 사람들이 관계가 불안해질 경우, 흔히 제 3자를 끌어들여 긴장을 완화하는 전략을 구사한다고 보았다. 이를 삼각관계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부부가 갈등 중이라고 하자. 두 사람은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은 채 자녀를 끌어 들여 둘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남편에 대한 욕구 불만을 아들에게서 해소하려는 아내나, 아내에게 하지 못할 말을 자녀에게 쏟아놓는 남편, 혹은 자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상대를 공격하는 부부, 이 모든 경우가 삼각관계를 이용한 왜곡된 갈등 해결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선택된 자녀는 해당 부모의 대화와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일종의 희생양이 된다.
소설 속에서 엄마는 자신의 들끓는 감정을 시댁과 남편에게 풀지 않고 그 대신 오빠를 택했다. 시댁에 맞설 수 없고 남편은 이미 죽어버렸으니, 감정 분화가 덜 된 오빠를 선택한 것이다. 엄마는 오빠를 보며 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그것은 자기 불안을 아들에게 투사하여 마음의 긴장을 완화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불안과 긴장을 해결해줄 거라는 무언의 압박을 엄마는 아들에게 행사한다.
희생양이 된 오빠. 오빠는 어떻게 해서든 엄마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래야 엄마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오빠의 불안은 증폭된다. 행여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나. 행여 대학에 못가면, 행여 취직을 못하면, 행여 집을 사지 못하면, 행여 사고라도 당하면······. 이제 엄마의 불안은 오빠의 것이 되고 만다. 엄마의 원망이 오빠에게 강한 기대와 그에 따르는 불안으로 전이된 것이다. 이처럼 가족구성원이 자신의 불안을 다른 가족구성원에게 투사할 경우, 삼각관계와 별도로 가족 투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체로 자주성이 적고 분화가 덜 된 자식이 투사의 대상이 되는데, 소설 속에서 오빠가 바로 그런 자식이었다.
안타깝게도 불안이 투사된 희생양에게 지나친 기대와 관심은 애정이 아니라 속박이다. 모든 불안이 집중되기 때문에 자식은 홀로 서지 못하고 사회적, 정서적 기능이 떨어지며 상황의존적으로 성장한다. 늘 부모 눈치를 보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없다. 그 결과,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소설 속에서 오빠는 자주성이 결여된 인물로 자아의 기능이 약했다. 오빠는 오로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삶의 목표일 정도로 엄마에게 밀착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보다 엄마, 그리고 주변 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이라는 외부의 강력한 위기가 닥쳤을 때, 오빠는 어느 한편에 서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아마도 그 밑바닥에는 어머니가 투사한 불안이 내면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빠가 불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을까?
우선 엄마의 입장에서는 자기 불안이 오빠에게 투사되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했다. 미분화된 자식에게 부모는 나무의 뿌리나 마찬가지다. 뿌리가 흔들리면 나무가 살 수 없듯 부모가 불안하면 자식의 생존은 위협받는다. 그러니 불안이 투사되지 않게 경계해야 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빠가 자기 분화를 온전히 이루는 일이었다. 분화가 덜 된 채 자아의 기능이 떨어졌으니 어떻게든 분화의 수준을 높여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엄마의 의견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자기감정과 의견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분리되는 순간은 아쉽고 두렵겠지만 그것만이 온전히 자아를 세우는 길인 것을 깨달았다면 오빠는 실어증을 앓지도 허망하게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