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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Feb 02. 2023

모자란 게 창피한 것인가?

아들러,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조선의 성군?  

   

  조선의 임금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몇 해 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에는 영조가 세자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여실히 나타나 있지요. 무술과 예술에 관심이 있던 아들에게 학문만을 강요하며 화부터 내던 아버지 영조. 그는 아들을 사랑으로 감싸기는커녕 늘 모욕을 줄 뿐이었습니다. 

  일례로, 영조는 불길한 말을 들으면 반드시 누군가를 불러 한마디를 내뱉은 뒤에, 비로소 대전에 들어갔는데, 그때 불려오는 이가 주로 사도세자였죠. 불길한 기운을 아들에게 투사한 셈이지요. 

  그런데 아버지 영조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영조는 의심이 많고 완벽주의적이며 결벽증적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숙종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숙빈 최씨로, 그 출신이 하급 궁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조롱을 당했죠. 게다가 이복형 이윤(훗날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영조는 잉여로운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왕이 되기에 결핍투성이 왕자였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세자 이윤이 경종으로 즉위합니다. 그러나 몸이 약한 경종은 얼마 후 후사가 없이 죽고 마침내 영조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영조가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병중인 경종에게 영조가 게장과 생감, 인삼과 부자를 함께 올렸는데, 일부러 상극인 음식을 올렸다는 것이었죠. 소문은 점점 확대돼 이인좌는 난을 일으켰고, 나주에서는 괘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왕위를 위협하는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죠. 일련의 일들로 인해 영조는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의심 많은 성격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 무수리의 자식이야. 그래서?

     

  무수리의 아들이다. 형 경종을 독살했다. 본래 왕이 될 재목이 아니다. 이런 말들은 분명히 영조의 열등감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그는 열등감에 시달려 희대의 폭군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영조는 조선의 위대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영조는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열등의식을 삶의 동기로 삼고 엄격한 자기 관리와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연입니다. 

  경연은 신하들과 함께 학문과 정치에 대해 두루 의견을 나누는 토론 시간으로 역대 임금 중 세종, 성종, 그리고 영조가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무려 3458 차례나 참가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죠. 단순히 참가만 한 게 아니라, 신하가 책을 읽다 틀리면 호되게 혼내는 등 신하들을 압도하는 학문적 수준을 갖췄지요. 그는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고 화를 내거나, 회피하는 대신 자신을 의심하는 신하들에게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런 까닭일까요? 가장 위태롭던 왕이 가장 오랫동안 임금의 자리를 지켰지요. 

  만약 정신분석학자 아들러가 영조를 만났다면 무척 반가워했을 것입니다. 아들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조는 열등감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동기로 받아들였을 거라고.      

  아들러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게 태어납니다. 갓난아이를 보세요. 얼마나 불완전한가요? 그대로 방치하면 곧 생명을 잃을 겁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의 생존전략은 무엇일까요? 그건 자신이 모자란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주위에 힘껏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울부짖음이죠. 부족한 자기를 지켜달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울지 않는다면 부모는 신경을 덜 쓸 것이고, 아이는 더 나은 삶을 사는 게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열등감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동기인 셈이죠.

  정통성을 의심받던 영조. 그는 어떤 왕보다 정통성에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심 많은 신하들을 피하는 대신, 경연이라는 학문적 토론을 통해 스스로 정통성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백성을 위하는 정치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그를 성군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열등감, 신화와 전설 속에도 등장한다.     


열등감과 그것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아들러의 말처럼 삶이란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그 보상인 까닭이지요. 이른바 영웅의 일대기를 떠올려보세요. 태어날 때부터 그들은 비정상적인 출생을 겪고 그로 인해 시련을 겪습니다. 그리고 훗날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자가 되지요. 어린 시절의 열등감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보다 나은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단군신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곰이나 호랑이는 어째서 환웅에게 찾아왔을까요? 그들 스스로 인간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열등감이 오랜 시간 동굴에 갇혀 쑥과 마늘을 먹게 했고, 결국 곰을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었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어떤가요? 그 역시 금와왕의 왕자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테고 결국에는 부여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했지요. 그의 아들 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여에 남겨진 주몽의 아들, 유리는 아버지 없이 자라며, 후레자식이라는 열등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열등감이 아버지를 찾아 부여를 떠나게 하고 마침내 고구려 두 번째 왕이 되도록 해주었죠. 역시 열등감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고대 그리스에도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으로 멀리 떠난 오디세우스. 그가 고향을 떠나자마자 아들 텔레마코스가 태어납니다. 스무 살이 넘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는 텔레마코스에게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고, 그 열등감이 마침내 아버지를 찾아 모험을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지위를 회복하는 모습이 참으로 감격스럽죠. 

열등감은 극적인 변화를 소재로 삼고 있어서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SF의 고전이라 할만한 ‘가타카’에는 자연적으로 출생한 결함 많은 주인공이 우수한 유전자를 선별해서 출생한 동생을 따돌리고 우주탐사라는 꿈을 이뤄냈고, ‘위대한 쇼맨’의 털보, 난쟁이, 거인 등 결함 덩어리 인물들은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오히려 쇼로 보여주었죠.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파국을 맞는다     


  열등감이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이를 감추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만약 영조가 자신의 열등감을 부정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신하들과의 불편한 경연 자리에는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했을 것입니다. 심하게는 자신을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신하들을 단칼에 죽였을지도 모르죠. 정치는 실종되고 영조는 성군이 아니라 폭군으로 기억됐을 것입니다. 

  이처럼 열등감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정서를 아들러는 ‘열등 콤플렉스’라고 불렀습니다. 열등감을 과도하게 느끼고 이를 부정하며, 애써 감추려고 타인을 속이거나, 다른 한편으로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스스로 과도한 보상을 하려는 심리 현상이죠. 열등 콤플렉스에 휩싸이면 작은 행복이나 보상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권력과 자본, 이룰 수 없는 사랑 등 과잉 보상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는 게 아들러의 설명입니다.     


콤플렉스의 덫에 걸린 살리에리     


  열등감으로 파국을 자초한 이야기로는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평범한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는 우연히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의 연주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기기보다 그 안에서 자신의 결핍을 사무치게 느낍니다. 과도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처럼 음악가 집안 출신이 아니라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결단코 반대했죠. 그런 그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 이제는 왕실의 신임받는 궁정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립오케스트라의 지휘자나 적어도 악장급으로 당시 모차르트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니 그는 얼마든지 자기 위치에 만족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차르트의 공연을 몰래 지켜보면서 자신의 열등감을 키울 뿐이었죠. 그는 절규합니다.      


  나의 소망은 음악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었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게 찬송의 열망을 심으시고는 날 벙어리로 창조해버렸어. 어째서요?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음악으로 당신께 찬송드리길 원치 않으셨다면, 어째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어 놓으신 거요? ······ 도대체 왜 재능은 안 주신 거요?

  그의 절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벙어리도 아니었고, 음악으로 뛰어난 수준에 올랐기에 궁정 음악가가 되었으며, 다른 이들보다 훌륭한 음악적 재능도 지니고 있었죠. 다만 그것이 모차르트처럼 압도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뿐이었습니다. 모차르트에 비해 재능의 결핍이 있었지만 ‘벙어리’라고 극단적으로 느낄 만큼은 아니었죠. 그는 결핍을 지나치게 과장되게 여기는 열등 콤플렉스에 빠졌던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열등감에 시달리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죽일 계획을 세우죠. 때마침 부친을 잃고 폐렴과 합병증으로 모차르트는 심신이 미약해져 있었죠. 그는 돈이 궁했던 모차르트에게 큰 액수를 제시하며 무리하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합니다. 모차르트는 이에 응하였고 얼마 후 과로로 쓰러져 숨을 거둡니다. 역사적 사실은 다를지 몰라도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의 열등 콤플렉스가 천재 음악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계모들의 비극은 열등 콤플렉스로부터     


  열등 콤플렉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앞에 놓인 삶의 과제를 외면한 채 열등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는커녕 그 상황을 회피하거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없애는 방법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 압도적 우위와 절대적 우월감을 느끼려고 자신이 그 누구보다 우위에 있다는 거짓 신념을 구체화하려고 하죠. 

  모두가 다 아는 백설공주의 계모를 보세요. 일국의 왕비로서 해야 할 여러 일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밤낮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누가 제일 예쁘지?’라고 묻기에 바쁩니다. 진정한 삶의 과제를 회피한 채, 외모의 열등감을 은폐할 목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추구하고 있죠. 그 방법은 자기보다 아름다운 이를 제거하는 범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외모에서 우위에 있다는 거짓 신념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어디 백설공주 뿐일까요? 우리나라의 고전에 등장하는 계모들 역시 열등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죠. 일단 계모들은 못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도 볼품이 없죠. 조선 후기 계모들은 대체로 몰락한 양반댁에 노처녀였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계모의 소생들도 한결같이 못나 빠졌습니다. 그에 비해 전처와 전처 소생은 외모도 아름답고 덕성을 갖추기까지 했죠. 물론 이런 설정은 계모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조선의 유교문화의 영향일 것입니다. 여하튼 기본적으로 계모는 결핍투성이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모가 양반댁의 후처로 들어왔다? 이건 그야말로 당사자에게 신분 상승에 버금가는 호사라고 할 수 있죠. 마음 편히 자기 삶에 만족하며 가족과 평화롭게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계모는 소소한 행복에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압도적인 우위, 절대적인 우월감을 느껴야 만족을 하죠. 걸림돌이 있습니다. 바로 열등감을 자극하는 전처 소생들이죠. 그러니 이들을 없애는 수밖에.      


열등감이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은?     


  흥미로운 것은 누군가는 열등감을 삶의 동기로 삼는 반면에, 누군가는 열등감에 시달리며 스스로 파국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 것일까요? 아들러는 열등감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는 각자의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법론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같은 과업이 주어져도 해결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수준이 비슷한 두 사람이 같은 시험을 치르는데 한 사람은 자신감 있게 문제를 해결하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불안으로 인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당당한 생활양식을 지녔고, 나머지 사람은 불안한 생활양식을 지닌 것이죠. 

  똑같은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태도가 다를 때가 많죠.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며 한 세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이주일. 그는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숨기지 않고 코미디의 소재로 삼았고, 이후에도 후배 개그맨들이 자신의 결함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반면 못생긴 외모를 숨기기 위해 반복적인 시술을 하다 그만 성형중독에 빠지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생활양식이 달라서 생긴 일이죠.      

콤플렉스를 유발하는 생활양식     


  생활양식은 생애 초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포용적이고 관대한 경우에는 자존감 높은 생활양식이, 부모가 사소한 실패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모진 경우라면 자존감 낮은 생활양식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열등 콤플렉스는 사소한 실수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이들이 주로 시달립니다. 열등하지 않아야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열등 자체에 대해 부정적 정서를 만들어놓는 것이지요. 자신이 모자란 것이, 앞으로 더 노력해야겠다는 동기로 작용하기보다, 모자라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정서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들에게 열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숨겨야 할 콤플렉스 덩어리인 것이죠. 

  정리하자면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열등감을 삶의 동기로 삼지만, 사랑이 부족한 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를 보세요. 살리에리의 아버지는 음악하겠다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은 반면,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연주 여행을 다닐 만큼 아들을 사랑하고 인정해주었죠. 굳이 부모가 아니더라도 인정과 지지를 받았더라면 살리에리의 선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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