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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작가 Oct 11. 2023

헬스장 마조히스트

스스로를 고문하며 행복한 사람들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서부터 싫어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운동회가 나에겐 운동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유치원시절 명랑운동회를 기억한다. 풍선 터트리기, 옆에 있는 아이와 달리기 경쟁을 해서 저 멀리 놓여있는 풍선을 터트리고 돌아오는 경기. 달리기로 경쟁에서 이긴 적이 없거니와 풍선을 엉덩이로 뭉개고 앉아 터트리는 건 너무 조마조마했고, 풍선이 터지지 않았을 때의 초조함과 민망함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또 어땠나. 5명으로 구성된 조별 달리기에서 중간만 했으면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달렸지만 언제나 결과는 5등이었다. 어떤 조든 꼴찌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내가 거기 속한다는 게 얼마나 싫던지. 그것도 엄마 아빠가 다 지켜보는 앞에서. 어린 시절 운동회는 나에게 늘 수치스러움를 안겨주는 것이었고 이런 기억 때문인지 운동자체가 싫어진 것 같다.


못하게 타고난 것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까. 못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낫다. 그래야 자존심이라도 챙기니까. 학창 시절엔 운동과 담을 쌓았다. 체육시간은 그저 노는 시간으로 생각했다. 발야구, 배구, 농구.... 배우기는 했어도 대충 시늉만 내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벤치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구경하는 쪽은 몸은 편했지만 심드렁하니 재미가 없었고, 땀을 흘리는 애들은 힘들어 보였지만 웃고 있었다.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렇게 덥고 힘든데 뭐가 좋다고 웃는 거지?


그나마 스무 살이 넘어서는 이제 악몽 같던 체육시간이 없으니 취미로 운동에 재미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재즈댄스, 볼링, 발레, 스키, 등산 등등.... 하지만 늘 돌아오는 것은 자괴감 뿐이었다. 근육이 없으면 유연성이라도 있던가, 체력이 안되면 순발력이라도 있던가! 165센티에 53킬로그램, 살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적당한 몸매, 팔, 다리, 손, 발이 길고 큰 편. 여러모로 봐도 운동을 못할 것처럼 생겨먹지는 않았다. 허우대만큼은 멀쩡하다. 하지만 그 잘난 허우대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남들보다 나은 신체적 능력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은 운동으로 삶의 즐거움을 찾는다는데, 나는 전혀 아니었다. 웬만큼은 해야 재미를 느끼는 나의 성격상 운동은 내 길이 아니었다. 운동에서는 늘 꼴찌, 아니면 하위권이었다. 자존심 상하게도. 그래서 잘 익은 포도를 바라보며 '저건 전혀 안 달고 시기만 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여우처럼 나도 운동 같은 건 안 해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책, 음악, 영화.... 방구석에서도 즐길 것이 이렇게나 많은 세상인데, 운동쯤 안 한다고 별일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운동을 내 삶에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산지 서른다섯 해가 넘어갈 때쯤, 그 사실을 깨달았다. 운동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인간에게는 육체라는 껍데기가 있으니 억지로라도 움직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것은 사실 심리적인 문제를 느끼 고부터였다. 머릿속이 하루종일 너무 많은 생각들로 복잡하고 피곤했다. 일을 할 때는 일 생각으로 바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쉬더라도 낮에 있었던 일과 내일 해야 할 일로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잠을 자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생각에서부터 벗어나는 시간이었지만 불안감은 잠조차 깊이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일상의 즐거움이 사라진 날들.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사나 싶고 그저 사는 게 고통일 뿐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침이 되어도 눈을 뜨기 싫은 날들이 이어졌다. 얼마 전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대피하라며 서울시의 긴급 문자가 온 어느 날 아침. 나는 왠지 문자를 보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도 괜찮겠다는 묘한 생각이 들면서.... 곧 문자가 오보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감마저 느꼈다.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 결국 심리상담을 받았고, 예상대로 심리 검사에서 우울감이 높게 나왔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생각이 너무 많다고 했다. 생각이라는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생각이 많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했다. 답은 운동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 운동은 잘하면 멋지지만 못하면 바보 같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떨치고 보니, 운동(運動)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작부터 운동과 경쟁은 떼어내고 봐야 했던 것이다. 


수영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를 느끼게 해 준 운동이다. 물속에서 힘을 빼고 가만히 몸을 맡기면 중력에서 벗어난 감각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수영은 힘을 빼야 하는 운동으로 여타 다른 운동과 달리 태초의 감각을 느끼게 해 준다. 역시나 운동신경이 없는 나는 중급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초급반을 맴돌 뿐이지만 그래도 수영을 좋아한다. 수영을 좋아하고부터는 누군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그 사람이 느낄 기분 좋은 감각을 알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그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가끔 잠이 오지 않으면 물 위에 떠 있는 나를 상상한다. 한동안 물 위에 둥둥 떠 있다가 살살 움직여 물살을 헤치고 나간다. 상상이 생생하게 감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꿈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꿈에서 아무런 고민 없이 실컷 수영을 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는 동네 헬스장을 다니게 되었다. 원래 다니던 수영장이 사설이었는데 근래 가격을 1.5배나 올렸다. 경기는 안 좋고, 물가는 점점 비싸지고 정말 살기 힘든 세상이다. 지갑이 가벼워질수록 먼저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여가생활비다. 책을 사는 비용, 영화관에 가는 비용, 운동에 쓰이는 비용이 가장 먼저 삭감된다. 수영도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다. 백수 처지인 난 눈물을 머금고 가성비 좋은 헬스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헬스는 정말 재미가 없다. 늘 의문이었다. 이 고문을 방불케 하는 운동이 뭐가 좋다고 오운완이니 챌린지니 하며 유행인 걸까? 원시 시대도 아니고 육체노동이 점점 없어지는 스마트한 시대에 저 울퉁불퉁한 근육들을 다 뭐에 쓴다고 못 만들어서 안달인지... 정말 의문이었다. 한평생 즐거운 일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뭐 그냥 건강 때문이겠거니 했다. 

마지못해 다닌 헬스장,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힘들지만 그래도 꾸준히 나가려고 노력했다. 머리를 비우는 데는 근육에 들어가는 압력에 집중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혼자 하는 것이 심심해서 그룹 피티에 참여했다.(그룹피티는 7~8개 정도의 운동을 두 세트, 강사의 지도 아래 여러 명이 함께 하는 클래스이다.)  그룹 피티 프로그램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운동이었다. 역시 혼자는 힘들지만 함께 하면 오기로라도 끝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그 고통이 조금은 상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라 조금 즐거운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저 근육맨들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운동을 웃으며 하는 이유, 내가 그룹피티를 하며 느꼈던 상쾌함은 자학적 쾌감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영을 할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수영 강습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정말 힘들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낯설고 괴롭다. 하지만 인정사정없는 수영강사들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숨이 차 올라도 봐주지 않는다. 레일을 돌고 돌고 도는 쳇바퀴가 1시간 내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드디어 시간이 지나고 벅차오른 숨과 무거워진 허벅지로 수업을 마무리하며 파이팅을 외치면, 그제야 나른한 쾌감이 밀려든다. 즉 몸을 혹사하고 나면 그 고통에 걸맞은 즐거움이 찾아오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쾌감에 젖어 생기 발랄하게 수영장 밖으로 뛰어나간다. 그 지속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꽤나 기분이 업된다. 


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룹 피티에는 매번 고통스러운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란 원통모양의 바이퍼를 들고 스쿼트, 바이퍼를 들고 런지, 스텝박스를 이용한 토터치와 마운틴클라이밍, 그나마 쉴틈이 되어준 암컬, 암컬에서의 휴지기를 고통으로 바꿔주는 아놀드프레스까지 모든 단계를 3분씩 1세트를 하고 나면 땀이 줄줄 흘린다. 앞사람을 보니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다. 마지막이 아니었다. 플랭크 자세를 3분하고, 다시 한 세트가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버티려는 오기의 몸짓이 시작되었다. 지옥 같은 한 세트를 마치고 또 마지막을 플랭크로 장식하고 나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쓰러지듯 매트 위로 무너졌다. 그리고 땀범벅이 된 얼굴 위로 실소가 터져 나온다. 몸을 일으키면 무겁던 머리는 가볍고 땀을 흘린 몸은 시원하다. 고통을 버텨낸 뒤에 찾아오는 쾌감. 그렇다. 헬스에도 자학적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학적 쾌감은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느냐에 따라 더 커지기도 한다. 하루 온종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결과물이 안 나오는 날이 있다. 뭔가 바쁘게 하긴 했는데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은 퇴근하는 발걸음만큼이나 마음도 무겁다. 집에 가서 드라마를 봐도, 밥을 먹어도 아무런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 왠지 다음날도 오늘처럼 실패가 계속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잠들 때까지 마음이 괴롭다. 그런 날 꼼짝하기 싫은 몸을 이끌고 헬스장을 나오면, 특히 내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달게 느낄 수 있다. 마치 그날의 죄책감을 만회하듯, 오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를 혼내듯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이 한계치에 다다르면, 카타르시스가 찾아온다. 부정할 수 없다. 이건 분명히 마조히즘이다.   


이젠 근육맨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무럭무럭 근육을 키워 뭐에 쓰려나, 자기 과시 아닌가? 색안경을 쓰고 보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저들도 마조히스트인게지. 근육을 키우려고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어. 고통으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일깨우는 것일 수도, 고통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 주는 쾌락에 중독된 것이다. 


이런 중독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일이 안 풀린다고 늘 푸념을 입에 달고 주변을 괴롭히기보다는, 술로 한풀이를 하는 것보다는. 오늘 하루 부족했던 것, 후회되는 일들은 그날 헬스장에서 스스로를 혼내며 풀어버린다. 운동이라는 고해성사로 그날의 죄를 씻는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글도 못쓰고, 돈도 못 버는 나는 오늘부터 헬스장 마조히스트가 되려 한다. 헬스장에서 마음껏 스스로를 혼내겠다. 오늘 하루의 후회와 아쉬움을 운동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그렇게 씻어내다 보면,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나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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